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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소 Aug 29. 2023

살짝 설렜어 난

이런 게 사랑일까?

어린이집을 다니고부터의 아기의 하루 일과.

오전 일곱 시 : 눈을 뜬다. 우유를 마신다. 아침밥을 먹는다.

오전 아홉 시 : 어린이집 등원을 한다.

오후 세 시 반 : 하원을 한다. 논다(집이든 밖이든 어디든)

오후 여섯 시 : 저녁밥을 먹는다. 씻는다. 우유를 마신다.

오후 여덟 시~아홉 시 : 한참을 꼼지락 하다 잠을 잔다.


엄마와의 절대적 시간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에는 엄마만을 찾는다. 아빠의 애달픈 구애에는 "가! 빼! 시러!"로 응대해 주시는 아기 님. 다행히도 회사에 재택 근무제가 있어서 평일에 한 번은 아기와의 하루를 함께 할 수 있다. 하나뿐인 아기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는, 그렇기에 재택 하는 날이 기다려진다.


오후 여섯 시, 아기는 엄마가 정성스럽게 만든 저녁 식사를 먹기 시작했다. 오후 여섯 시 반, 업는 끝이 났고 방에 있는 아기 사진을 들고 거실로 나섰다. 사진은 생애 첫 비행기 탑승을 위해 찍은 아기의 증명사진이었다. 방에서 나오자 "압뽜~" 하며 반기는 아기. 아기는 의자에 선 채 샤인머스캣을 후식으로 먹고 있었다. 숟가락질이 미숙한 아기는 옷과 몸 군데군데 음식물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일어서서 금세 샤인머스캣을 먹어치우는 아기. 후식도 다 먹었다 싶어 방에서 갖고 온 자신의 사진을 구경시켜 주었다. 냉큼 낚아채는 조그만 손. 앙증맞은 손에 쥐어진 사진은 곧 입으로 향했고 조그만 치아로 사진을 덥석 깨물었다. 사진도 먹는 것이라 생각한 걸까. 그건 맛이 안 나는데 말이다.


저녁도 다 먹었으니 이제는 목욕을 할 시간이다. 엄마를 찾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순순히 검지 손가락을 잡고 함께 탕에 들어갔다. 입에는 여전히 여권 사진이 물려 있었다. 대각선으로 접힌 증명사진을 입에 물고 아기는 목욕물에 발을 담갔다. 입에 있는 사진을 빼려고 시도했지만 아기는 싫다고 징징대었다. 억지로 하면 반감만 더 살 것 같아 포기한 채 조그만 몸뚱이에 비누칠을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입에 물고 있던 사진 내 입으로 향했다. 충치가 옮는다고 해서 여태껏 입술 뽀뽀도 하지 않았는데. 이를 어찌해야 하나. 이것은 무슨 시그널인 것인가. 엉겁결에 입에서 입으로 받아 든 아기의 구겨진 여권 사진. 아기는 내 입으로 옮긴 걸 확인하더니 번에는 내 어깨를 잡고 다시 자신의 사진을 회수하였다. 조그만 손이 내 어깨를 만질 때의 기분이란. 조그만 치아가 여권 사진을 도로 가져갈 때 느낌이란.

이것은 설렘이었다. 아빠의 심쿵한 모습이 즐거웠는지 까르르하는 아기. 아기가 웃는 틈에 사진이 목욕물에 떨어졌다. 설렘도 잠시, 지지부진해지는 목욕을 마저 끝내기 위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물에 빠진 사진을 꺼내었다. 아기 두리번 두리번하며 사진을 찾았지만 아무 일 없던 듯 동요하지 않고 목욕을 마무리하였다. 조그만 몸뚱이를 헹구면서 나도 모를 노래를 흥얼거린 채. < 오마이걸, 살짝 설렜어 > 그렇다. 난 살짝 설레었다.


목욕을 다 마치고 조그만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는데 히죽히죽 되는 미소는 참을 수 없었다. "가! 빼! 시러!"가 주된 대사인 아기에게 어떤 호감을 얻었다고 할까. 재택의 효용성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지만 적어도 육아를 하는 아빠 입장에서는 순기능이 있긴 하다. 회사가 일주일 내내 재택을 했으면 좋겠다. 아기와의 절대적 시간이 많아질 수 있으니. 이제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줘야 하는데 자꾸 다른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살짝~ 설렜어~ 난!!


살짝 설렜어 난 Oh nananan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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