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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보이 Nov 21. 2017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프롤로그.

오전 10시경, 오늘도 역시 동생이 시끄럽게 집을 나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항상 이 시간이면 나를 제외한 집안의 모두가 분주해진다. 침대에서 눈만 뜬 채로 지난밤 무슨 일이 있진 않았는지 혹은 흥미로운 사건이 없었는지, 인스타며 페이스북이며 쓰윽 한번 훑어보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비고는 아무 생각 없이 주변을 한번 둘러본다. 지난 밤동안 나에겐 아무런 일도 없었다. 모든 게 어제와 같이 그대로다. 홀로 남겨진 집에선 고요함과 적막함이 내 주변을 겉돌고 있을 뿐이었다.


 서둘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 날이 추운 것 같다.

춥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머리에서 오늘 밖으로 나갈지 말지 결정을 유도한다. 이게 빌어먹을 함정이다. 여기서 집에 짱 박혀서 몸의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면, 하루 종일 '나는 머저리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찝찝한 기분을 자기 전까지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게 분명했다. 그래서 후다닥 휴대폰만 챙기고는 집에서 나와버렸다.


사실 아침에 뛰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8월부터 시작했으니 3개월 정도, 달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는 아니고, 중간중간 게으름도 많이 피웠다. 꾸준히만 하자는 생각에 무리해서 뛴다거나 뛰는 양을 늘리는 일도 없었다. 그냥 하루라도 안 뛰면 몸이 근질근질 해질 정도의 꾸준한 생활 습관이 되기를 원했다. 




난 예전부터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하는 법을 몰랐다. 게임으로 예를 들면 레벨 50까지는 열심히 하다가(만렙은 99이다.) 질려버려서 금방 다른 직업을 택해 새롭게 키우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별 재미를 못 느끼면 또 다른 직업을 찾거나, 아예 다른 게임을 새로 시작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랬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게임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게임보다 더 재밌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게임 다음으로 나에게 큰 흥미를 던져준 건 패션이었다. 나는 단지 옷이 좋아서 이것저것 사 입었을 뿐인데, 주변에서 나를 치켜세워주더니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봐 주는 것에서 느껴지는 희열감이 정말 좋았다. 정말 이거야말로 내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래서 돌고 돌아 20대 중반 즈음, 오로지 패션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었다. 패션 전공을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처음으로 다녔던 직장도 패션회사였다. 물론, 그 안에서의 역할은 디자이너였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서른 문턱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나에 대한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다양한 분야에서 불같이 타올랐다가 불같이 식어버리면서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한 열망만큼은 몇 년이 넘도록 지속해오고 있었다는 것. 그게 패션이든 디자인이든 카페 사업이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체력을 만들기로 다짐했다. 멋진 몸을 만들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건강상태를 만들고 싶었다. 소설가들 사이에서 '멋진 작품은 엉덩이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는데, 즉 얼마나 꾸준히 지속하는지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에 대한 키포인트인 셈이었다.

나에게는 지치지 않는 체력이 필요했다.


집을 나오자마자 유튜브에 들어가 노래를 세팅했다. 노래는 달리는 도중 일정 흐름을 유지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왠지 모르게 처져있을 때는 다이나믹한 노래를, 달리면서 좀 더 호흡을 느끼고 싶을 때는 차분한 하우스 음악을 선곡한다. 그리고 가끔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는 강연 동영상도 틀어놓는다. 

달려야 한다는 목적에서 오는 긴장감을 갖는 동시에 나와 내 몸이 함께 호흡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서 오는 안정감이 나를 더욱 고양시킨다. 천천히 공원까지 걸어가면서 그 날이 주는 햇볕과 찬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밤새 자고 있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다.

짧게 준비운동을 끝마치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한 바퀴를 완주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말자는 것이 달리는 동안의 내가 정한 규칙이다.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정확하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이 어쩌면 내 삶과 직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부족했던 끈기를 인지하는 것에서 오는 책망인 것일까? 어느샌가 서른이 된 나는 내가 행하는 모든 행동에는 크던 작던 책임이 따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마지노선이었던 20대에 나처럼, 더 이상 '난 원래 끈기가 없어'라는 자기 합리화로 얼렁뚱땅 넘어가기에는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일단,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기로 다짐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얼마 전에는 3개월 동안의 꾸준함의 댓가(?)로 나에게 런닝화를 선물해주었다. 좀 더 즐겁게 달리고 싶은 마음과 달리는 행위에 좀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에 투자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동시에 무언가를 투자함으로써 쉽게 그만두지 말아야 할 이유도 만든 셈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달리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비록 이 글이 달리기와는 큰 상관관계가 없을지라도, 무언가 여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달리기 전, 혹은 달리는 도중, 달린 후에 따라오는 생각들이 나에게 어떤 자극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모니터 앞에서 지금처럼 자판을 두들기는 것보다도,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며 호흡을 느낄 때야말로 비교가 안될 만큼의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교차한다. 나는 꾸준히 달리는 동시에 꾸준히 이곳에 내 생각과 느낌들을 이곳에 풀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의 제목의 원제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저자는 이야기한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에 보았던 이 구절이 30대가 되어서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시에 느꼈을 감정이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의 공감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다른 종류의 절박함과도 같았다. 아무도 내가 달려야 할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내가 달리던 말던 알바인가?

하지만, 본인만큼은 알고 있어야 한다. 내가 왜 달려야 하며, 지금 왜 달리고 있으며, 내일은 왜 또 달려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에게 물을 것이다. 내가 달린다고 해서 갑자기 내 인생이 180도로 바뀔 일은 없으나 계속되는 지속감은 느린 속도로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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