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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07. 2015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위에 다시 나를 쌓자

나는 누구일까?

어릴 때 본 책에서 이런 얘기를 본 기억이 있다. 어떤 남자가 죽어서 사후세계를 갔는데 신이 이 남자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남자는 대답했다.


"저는 이경훈입니다."


신이 다시 얘기했다.


"네 이름을 묻는 게 아니다. 너는 누구냐?"


이번에도 남자는 대답했다.


"저는 38살이고, 서울에 살고 사업에 실패한 남자입니다."


신은 다시 같은 얘기를 했다.


"네 나이를 묻는 것도 아니고, 네 경력을 묻는 것도 아니다. 너는 누구냐?"


그렇다면, 진짜 나는 누구일까?




출처 : http://www.atacamaphoto.com


어렸을 때 나의 가장 궁금한 것은 내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내가 누구인지 정의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삶에서의 기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정의가 먼저 내려져야 앞으로의 내 방향성이 정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진정한 자신일까?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의 영향으로, 학교에서는 교육의 영향으로, 그리고 이후에는 온갖 문화와 규범 속에서 자기 자신은 이미 희석되어 사라져 버린다. 짜디 짠 소금물로 시작했던 우리는 수 많은 물이 더해지면서 이제는 짠맛이 거의 느껴지지도 않게 된다.


그러하기에 나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는 '부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교육받아왔던 것을 부정하고, 문화를 부정하고, 지식을 부정한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말대로 모든 것을 부정한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나'만 남게 되었을때, 그때 다시 하나씩 쌓아나가야 한다.


사실 교육 과정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이런 부정의 단계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외교관인 아버지로 인하여 어릴 때 초등학교 3년은 아프리카에서, 중학교 3년은 그리스에서 생활하였다. 그곳에서 국제학교를 다녔으니 금수저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나름 은수저의 삶은 산 셈이다. 그곳에서는 초등학교 때도 개인의 선택을 중요시 해서 학생들이 자기가 들을 과목을 직접 수강신청을 하였다. 물론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한국에 돌아와서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면서 일률적으로 같은 모습을 취하게 만드는 학교가 무척 어색했다.


초등학교 수업을 받을 때 일이다. 무슨 과목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떤 과학 수업이었던 것 같다. 한 실험실에 모인 우리 어린이들은 짝을 지어 자리에 앉고 두꺼운 종이 두개를 부여받았다. 첫날 수업에서는 그 종이를 이용하여 어떤 식으로든 건물을 만들라는 미션을 받았다. 어리둥절한 우리들은 동그랗게 말기도 하고, 블럭을 만들기도 하면서 가지각색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쯤 선생님은 각자 만든 종이 기둥 위에 나무판을 얹고 무게를 얹으면서 아이들의 손으로 만든 종이가 하중을 얼마나 버티는지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그게 수업의 끝이었다.


다음날도 우리는 같은 곳에 모였고, 또 다시 종이가 주어졌다. 따로 얘기가 없어도 아이들은 모두 종이 기둥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모두 어제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다음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점은, 나를 포함한 아이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수업은 이어졌고, 한참 후에야 지금까지 우리가 직접 겪었던 경험들을 토대로 이론 수업이 시작되었다.


고백하건대, 그 때 수업에서 배운 '지식'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건축 쪽 커리어를 간 것도 아니니, 내 성향 파악에도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방법론을 익혔다. 그런 교육의 영향인지, 한국에 와서도 대학교를 가서도 나는 항상 '원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수학 공식을 외우는 것 보다 이해하는 게 편했고, 대학교에서 시험 공부를 할 때도 책의 서문부터 소설책 보듯이 모든 내용을 한자한자 읽으며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려 했다. 그래야만 이해가 되면서 암기가 되었고, 또 그래야만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게 느껴졌다.


행복해지려면 나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나를 알려고 하는 교육이 없다. 틀을 만들어놓고 모두를 거기에 무작정 맞추려 한다. 그러하기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오로지 나만의 몫이다. 정작 그런 교육이 필요했던 사춘기 시절에 공식만 주입받은 우리는, 성인이 된 지금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다시 새롭게 쌓으면서 내 자신을 찾아야 한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의 숙명이다.


사춘기는 끝나서는 안된다. 철학은 멈춰서는 안된다. 철이 든다는 것은 타협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다시 쌓은 결과가 기존과 같아 보일 수는 있지만 그 깊이는 절대로 같지 않다. 그렇게 내 자신을 스스로 알아야만 행복의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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