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도시
은행 문이 닫혀 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환전을 어디서 하지? 초반부터 꼬인다.
갑작스레 준비한 여행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짧은 여행이라 그런지 이번 여행은 거의 준비를 안 했다. 출발하기 전날인 어제서야 몇 시 비행기임을 확인하고 공항에서의 픽업을 확인할 정도다. 여행에 둔감해진 걸까. 생각보다 들뜨지도 않는다. 이번 주 회사 일이 바빠서였는지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야 비행기에서 내리면 어느 정도 돌아올 텐데 가장 중요한 환전을 깜박했다. 이건 뭐... 가자는거냐 말자는 거냐. 저녁에 급하게 알아보니 인터넷뱅킹으로 주문하고 공항에서 찾으면 된다길래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었는데, 가방을 보니 OTP를 회사에 두고 왔다. 산 넘어 산이다.
혹시나 싶어 새벽에 공항 가기 전에 현금이라도 뽑아 놓으려고 했더니 ATM도 7시 반이 되어서야 문을 연단다. 시작부터 꼬인다. 그래도 뭐 걱정은 안 한다. 한두 번 떠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어찌어찌 되는 게 여행이다.
공항은 생각보다 금방 도착한다. 10시 비행기인데 도착하니 7시다. 3시간 전이니 시간은 충분하다. 일단 1층 환전소가 더 저렴하다는 정보를 들은 거 같아서 그쪽으로 향해본다. 다행히 외환은행 환전센터 옆에 주력은행인 국민은행 ATM기도 있다. 환율은 비싸겠지만 그래도 이번 여행 갈 수는 있겠다.
그런데 얼마를 환전하지... 장기 여행할 때는 예산을 빠듯하게 가는데 이렇게 4일을 갈 때는 오히려 예산에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한참 고민하다 달라로만 400달러를 받는다. 하루에 100달러씩이다. 동남아 여행 때 숙박 포함하여 하루에 3만 원 사용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사치다. 물론 이걸 다 쓸 생각은 없다. 안 쓰면 달라로 가지고 있다가 다음 여행 때 쓰면 그만이다.
아... 그 부자들만 한다는 공항 환전을 결국 내가 하고 말았다. 저지르고 나서 고민은 무의미하지만 혹시나 해서 현재 환율을 찾아본다. 여기서 환전하는 바람에 달러 기준으로 약 2만 원 정도 손해 봤다. 어찌 보면 큰 돈이고 어찌 보면 또 얼마 안 되는 돈일 수도 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 보면 나도 요새 참 돈에 무심해졌다. 아니면 귀찮아진걸까...
일단 밥부터 먹자. 여행에 특화된 크로스마일리지 카드의 혜택을 이럴때 최대한 누려야지. 인터넷 찾아보니 칸지고고라는 식당이 무료 식사를 제공한다기에 가보니 이제는 안한단다. 얘네는 뭐 이리 맨날 바껴. 대신 명가의 뜰이라는 식당에서 무료 식사가 가능하다고 안내해준다.
'명가의 뜰'도 꽤나 고급이다. 나 같은 무전취식 손님이 많은지 주문하면 20분이 걸린단다. 뭐 시간도 많고, 여행기도 쓰기 시작도 해야 하니 나쁘지 않다. 주문하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래도 일찍 오니 여유가 있어서 좋다.
원래 여행은 집문을 나설 때 시작하는 법인데 이번 여행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느낌이다. 저번 여행에서는 삭발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계기가 필요할까. 여행의 핵심은 '분리'인데 난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다. 천천히 떠나 보자. 너무 억지스레 뭘 하려 하지 말고 흘러가는 데로 놔둬보자. 요즘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이 그거 아니었던가. 무리하게 역행하지는 않으면서도 내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놓치지 않고 쳐다보기.
식사를 마치고 일단 수속부터 하러 간다. 여전히 시간은 충분하다. 어차피 로밍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기에 바로 체크인으로 가는데...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이리 사람이 많지? 생각해보니 연휴다. 나도 연휴라 여행을 와놓고서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리겠다. 그래도 짐이 워낙 없기에 셀프 체크인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번 여행의 짐은 정말 조촐하다. 티셔츠 하나에 추리닝 바지 하나, 그리고 속옷과 양말 몇 개가 전부다. 나머지는 그냥 현지에 가서 살 생각이다. 기념품도 되고, 짐도 줄이고 일석이조다.
체크인을 마치고 보딩을 하러 간다. 역시 사람이 많다. 그냥 차근히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런데 왜 느낌이 여행이 아닌 출장을 가는 기분인걸까. 뭔가 의무적으로 행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보딩까지 마치니 탑승까지 대략 한 시간이 남았다. 원래 면세점은 그냥 논스톱으로 패스해버리지만 오늘은 미션이 있다. 여행 간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어머님이 어버이날 선물을 미리 지정해서 사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건 선물인지 요청인지... 뭐 어차피 살 것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던 와중이라 귀여운 부탁을 들어드리기로 한다.
원하시는 건 Ray Ban 접이식 선글라스이다. 매장이 보이길래 바로 가본다. 조금 헤매지만 찾아보니 보내준 사진과 똑같은 것이 있다. 똑같은 거면 오히려 싫어하시지 않을까? 보아하니 친구분이 사 오신 거 보고 사달라는 것 같던데... 어차피 내가 고르는 것도 아니기에 확실히 하기 위해 한번 전화해서 여쭤보니 상관없단다. 아니 오히려 굳이 똑같은 게 좋단다. 개성보다는 실효성을 따지는 어머니의 성향이 나타난다. 여하튼 이번 어버이날 선물은 이렇게 쉽게 완료!
남는 시간에는 화장실도 가고 책도 보며 기다리다 시간이 되어 보딩을 한다. 편도신공과 꾸준한 마일리지 적립으로 이번에도 대한항공을 타게 되었다. 사실 지금의 이 표는 1년 전에 베트남에서 돌아올 때 만들어진 표다. 1년 만에 그 남은 표를 쓰는 셈이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대한항공은 사치의 대표로 불리지만 이렇게 마일리지로 저렴하게 타는 입장에서는 그런 거 없다. 헌데 사실 나는 대한항공과 저가항공의 차이를 크게 못 느끼겠다. 다리도 짧아서인지 대한항공이 그렇게 차이 나게 편한 것 같지도 않거니와 서비스에서도 압도적인 면은 없다. 아닌가. 갑자기 예전에 삼각김밥과 물 하나 주던 제주항공의 기내식이 떠오르네. 근데 이번 항공은 2시간인가 그럴 텐데 기내식이 나올려나? 기내식 마니아로서 한번 기대는 해본다.
탑승 안내가 나오고 비행기에 올라탄다. 내 자리를 찾아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갑자기 졸음이 미칠 듯이 몰려온다. 이래저래 불안했는지 오늘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졸릴만하다. 이륙도 안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눈을 뜨니 이미 하늘 위에 떠 있다. 얼마나 잔 거지? 헌데 오늘따라 공기가 굉장히 불안정한가 보다. 비행기의 흔들림이 좀 심하다. 하필이면 기내식도 이때 나온다. 역시 대한항공, 짧은 비행이라도 기내식은 놓치지 않는구나. 게다가 이 퀄리티 보시게나. 덜컹거리는 비행기에서 따끈따끈한 스테이크를 꾸역꾸역 먹는다. 이 엄청난 흔들림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옆의 커플은 이 흔들림이 불안한가 보다. 둘이 안절부절이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문득 한 가지를 깨닫는다. 아... 싱글로 떠나는 여행은 이번이 7년 만에 처음이구나. 이래서 계속 마음이 들뜨지 않았던 걸까? 최근에 급격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어서, 그리고 불안정한 상황이어서 여행에 집중하지 못하는 걸까.
독거노인의 삶을 산지도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생각해보면 연애 안 하고 1년을 지낸 게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나도 참 사랑을 많이 하며 살았다. 예전 여자친구가 헤어지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자기는 연애 안 하고 살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빨리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했었다. 나도 내 스스로가 홀로보다는 서로 의지하고 살 때 더 깊어진다고 생각을 하긴 한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홀로만의 시간을 어느 정도는 갖고 싶다. 홀로 선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거와 약해진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다르다. 외로움에 잠식당하지 않고 내가 외로움을 장악하고 싶다.
지난 여행 이후 확실히 죽음에 대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비행기만 타면, 특히 많이 흔들리는 비행기에서는 불안감이 극도로 심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그렇다. 여기서 죽어도 사실 괜찮겠다는 생각도 든다. 남들이 나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는 나는 그래도 주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믿는다. 내가 뜻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그 길을 가기 위한 용기가 있고 신념이 있다고 스스로는 믿는다. 물론 하루하루가 모두 의미가 있을 수는 없고, 지금의 하루 혹은 한 달이 내 뜻대로 되지는 않을지언정 1년, 5년이 지나면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내가 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물론 그 원하는 내가 어떤 모습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루를 살 줄 알기에 죽음이 그리 두렵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할 일들 정리를 좀 해봐야겠다. 일단 환전은 달라로만 400달러를 준비하였기에 최소한 백 달러를 현지 돈으로 바꿔야 한다. 공항에서 게스트하우스 까지는 호스트가 픽업을 나오기로 했으니 일단 게하에 가서 정보를 얻어야 한다. 오늘은 아마 정찰의 개념이 될 거다. 점심은 기내식으로 때웠으니 시간이 날 때 동네를 최대한 많이 걸어서 돌아다녀볼 예정이다. 앞으로 4일을 있을 곳이니 이 도시가 내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첫날에 최대한 편해지고 싶다. 물론 옷도 사야 하고, 세면도구도 사야 하고... 사실 가져온 게 없으니 다 사야 한다.
처음 와보는 러시아는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공항에 서 있는 경비들의 표정에서 KGB의 향기가 느껴지는건 내가 쫄아서일까. 왠지 탐크루즈 형님이 인피면구를 벗으며 어디선가 나타날 거 같은 느낌이다.
그나저나 비행기가 한 시간 정도 연착했다. 게하에서 픽업 오기로 한 것만 믿고 알아본 것도 없는데 만약 기다리다 그냥 가버렸으면 어쩌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살짝 걱정이 된다. 여기 사람들 영어 안 통하기로 유명하다던데. 그래도 확실히 비행기에서 내리고 주변 분위기가 이국적으로 바뀌니 여행 느낌이 살짝 나기 시작한다. 물론 아직도 주변에서 한국말은 꾸준히 들려온다. 공항만 벗어나면 그마저도 없겠지. 아마도.
다행히 픽업은 아직 기다리고 있다. 흠... 미녀닷! 러시아 기준으로도 이분 미녀 맞다. 아 갑자기 너무 헤픈 웃음을 지었나. 이분을 보니 드디어 여행을 온듯한 느낌이 든다. 경훈아 그런 거였냐...
나를 K라고 소개한다. '경훈'이라는 이름은 너무 어려워서 그냥 첫 글자로 보통 얘기하고는 하는데 이게 러블리즈의 케이가 갑자기 뜨면서 좀 이상해졌다. 그래도 내가 먼저라는 거! 이분 이름은 엘리노어... 였었나? 뭐라고 하는데 금세 잊어버린다. 하긴 내가 언제 이름을 한 번에 기억한 적이 있어야지.
차에 올라타고 같이 숙소로 향한다. 이분 타자마자 내 사촌동생 얘기를 한다. 지난주에 왔던 엄청 이쁜 춤추기 좋아하는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 아니, 지선아... 이 조용한 동네에서 뭘 하다 간 거니. 동생이 일주일 후에 내가 온다고 떠나기 전에 미리 얘기를 했었나 보다. 호스텔은 공항에서 차로 40분 정도 거리라고 한다. 이분 영어를 못하는 건 아닌데 뭔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족하다. 조금 어색한 40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사교성도 있고 나이도 얼추 나랑 비슷해서 얘기가 잘 통한다. 아쉽게도(?) 이미 결혼은 하셨단다. 나보고 결혼을 했냐고 묻는데 뭔가 찔려서 구구절절 얘기하게 된다. 장기 연애를 했는데 어쩌다 헤어지고 그러다 보니 이러쿵저러쿵. 요새 나 나이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는 건가? 뭔가 자꾸 이런 질문에 당당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의 관성과 상관없이 내 길을 가자고 다짐해놓고는 왜 이리 맨날 휘둘리는 걸까.
올해 나이가 한국 나이로 39이다. 생일은 안 지났으니 만으로 하면 37이다. 이놈의 아홉수가 사람을 조금 조급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내년이 되면 마흔이라는 사실이 자꾸 무의식 중에 압박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것보다, 내가 나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인생 길다. 마흔이면 아직 반도 안 산 거다. 조금 더 여유 있고 느긋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은데 이 빌어먹을 숫자가 자꾸 제약을 건다. 차라리 이 뒤늦은 성인식(노인식)을 후딱 해치우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들어온다. 러시아는... 확실히 러시아인가 보다. 길거리에 여인들이 정말 속된 말로 다 쭉쭉빵빵이다. 나 이런 단어 잘 안 쓰는 사람인데 진짜 그러하다. 남자들은... 사실 눈에 안 들어와서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남자들 보다는 여자들이 더 아름다운 나라 같다. 그렇게 일리노아(이름 이거 맞나...)에게 얘기하니 자기는 오히려 한국 여자들이 이쁘다고 한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우리나라 여자들이 가장 이쁘다고 생각은 한다.
러시아에서 만난 이 친구 덕분에 러시아에 대해 굉장히 좋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러시아라는 곳에 대하여 약간의 거부감과 일종의 두려움(?) 마저 가지고 있었는데 얘기해보니 너무 착하고 친절하다. 사실 어디서든 사람 사는 건 똑같다. 어디 가나 배려 깊은 사람, 이기적인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 아픔이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인종이나 국적으로 이미지를 가지는 것도 어찌 보면 굉장히 편협된 생각이다.
그저 픽업만 하는 줄 알았는데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도시를 한 바퀴 돌며 상세히 설명을 해준다. 은근히 이 동네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왜 여기로 놀러 오는지는 모르겠단다. 하긴 나도 서울에 굳이 왜 오는지 잘 모르겠으니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차를 몰더니 한 전망대에 잠시 내려준다. 전망이 좋은 곳이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이 아닌가 싶다. 여기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남산 같은 곳인가 보다. 여기저기 자물쇠들이 알록달록하게 채워져 있는 것을 보니 진짜 블라디보스토크의 남산 맞다. 그 와중에 '사랑해'라고 한글로 쓰여 있는 자물쇠도 보인다. 이놈들아 작작해라. 뭔 여기까지 와서 염장을... 싱글로 오는 여행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달라를 환전해야 한다고 은행이 어딘지 물어보니 또 굳이 같이 은행에 가준다. 너무 친절해서 사촌동생의 언질이 없었다면 사기꾼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다. 근데 막상 은행에 가보니 같이 와준 게 다행이다. 은행 내부에 영어는 단 한마디도 안 쓰여있고, 영어를 하는 스탭도 없어 보인다. 여행 다니면서 느끼는 거지만 문화적으로 전통이 깊고 자부심이 있는 곳에서 특히 영어가 안 통한다. 프랑스가 그러하고 베트남이 그러하고 러시아가 그러하지 싶다. 아님 그냥 시골 동네라 그런가.
일단 200달러만 환전을 한다. 나머지는 상황 봐서 해야겠다. 사실 200달러면 하루에 50달러다. 짧은 여행이라 돈을 엄청 아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쓰는 건 오히려 여행에 방해가 된다. 돈을 주니 알아서 환전해주더니 자기 지갑에서 얼마인가를 꺼내서 캐셔에게 건넨다. 아마 잔돈이 안 맞아서 환전이 편하도록 자기 돈을 얹어서 같다. 진짜 친절이 감동으로 느껴질 정도다. 하루 만원짜리 숙박을 주면서 이렇게 친절할 수가 있을까.
다시 차에 올라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이런 저런 설명해주더니 마지막으로 호스텔로 데려간다. 가는 길에 거리를 유심히 보지만 간판 하나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이 없다. 여기서 혼자 돌아다니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걱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여행지는 하루 이틀 있으면 다 똑같아지는 법이다.
호스텔은 굉장히 특이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파트 같이 생긴 곳 한켠에 허름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절대 지나가다 찾아올 수는 없는 곳이다. 에버비엔비의 혜택을 많이 받은 곳이 아닌가 싶다. 어찌 보면 그래서 친절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호스텔은 어떻든 상관없다. 그냥 편하고 안전하면 전부다. 그리고 안주인을 보니 여기만큼 편한 곳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숙소를 들어가서도 신경 써서 좋은 침대를 배정해준다. 둘러보니 모든 숙박객이 러시아인이다. 외국인은 나 혼자 같다. 진짜 이래서 친절한 거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여기 호스텔에서는 사람들과 친해져서 어울리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르겠다, 스탭들하고는 조금 친해질지도.
자리 안내를 하고도 계속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한다. 그러다 갑자기 어딘가를 가더니 초콜릿도 하나 가지고 온다. 얘기를 들어보니 소금이 들어간 초콜릿이란다. 특이한데? 먹어보니 이거 또 굉장한 문화충격의 맛이다. 초콜릿과 소금도 은근 어울리는 거 같다. 당첨! 기념품으로는 얘를 사가서 나눠줘야겠다.
이번에는 지도를 피더니 갈만한 곳을 알려준다. 근데 사실 지도를 보면서 아무리 공부해봤자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 여행 가면 늘 하는 얘기지만 다리가 아픈 만큼 그 동네가 나에게 다가오는 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지도가 러시아말로만 되어 있다. 그래도 도움이 될까 싶어 구글 지도를 다운 받아서 몇 가지 포인트를 적어둔다.
어느새 4시가 넘었다.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하니 오늘 최대한 돌아다니면서 신고식을 치러야 한다. 조금 앉아 있다가 내가 이제 나가보겠다고 하니 또 굳이 자기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고맙긴 하지만 여기까지가 적당하다. 이제는 발로 걸을 때다. 자꾸 태워주면 돌아오는 길도 못 찾을지 모른다며 그냥 걷겠다고 한다. 어차피 여기서 4일을 있으니 또 친해질 시간이야 있겠지.
아까 들은 얘기를 토대로 나와서 대략 방향을 잡고 걸어본다. 여기는 정말 관광지는 아닌 느낌이다. 어찌 보면 공업도시의 느낌마저 들 정도로 길이 삭막하다. 그래도 한 15분 걸어가니 바다내음이 나기 시작한다. 바다 근처에는 항상 머물만한 곳이 있다고 믿기에 첫 번째 목표를 일단 해변가로 정했다.
가끔가다 외국인이 한둘 보이지만 혼자 다니는 외국인은 나 혼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진짜 김태희가 밭 갈고 한가인이 논매는 느낌이다. 어찌나 다들 훤칠한지. 이런 곳에 있으니 내가 더 쭈그리가 되는 느낌이라 살짝 움츠러들기도 한다. 그러지 말자. 나 대한민국 표준 키, 174cm이다. 우리나라 평균 남성들을 위하여 어깨에 힘을 팍 주고 걸어간다.
해변은... 솔직히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다. 지금까지의 느낌을 봐서는 사실 이곳으로의 여행은 추천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마음에 든다. 묘한 이국적인 느낌도 좋고, 동네 마을 같은 평온한 모습도 좋다. 이제 드디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걸까.
비싸 보이는 식당이 있어서 일단 한번 가서 가격 조사를 조금 하고 나온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닌데 아직 식사 시간도 아니거니와 이곳에서의 첫 식사를 그리 호화롭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한 바퀴를 쭈욱 둘러본다. 하나 걱정되는 건 희한하게도 기념품 가게가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옷을 현지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에 잠옷 포함해서 티셔츠를 달랑 하나만 들고 왔다. 그 말인즉슨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결국 전부라는 얘기다. 그런데 티셔츠를 파는 곳이 하나도 안보인다. 내일은 해변 말고 내륙(?) 쪽을 좀 둘러봐야겠다. 아 맞다, 내일 비 온다고 했던가? 뭐 어찌 되겠지.
해변에는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하는 여인들도 있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켠에서는 벌써 한잔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백인들은 확실히 살이 타는 거에 대한 공포가 없나 보다. 햇볕에 일부러 몸을 노출 시키고 있다. 나는 타면 안 된다. 이제 싱글의 치열한 경쟁시장으로 온 만큼 피부 관리가 필요하다. 모자도 없으니 손으로 가리며, 그늘로 피해서 이동한다. 근데 여기 해가 서울의 해보다 뜨거운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위치가 한참 북쪽인데 날씨는 우리나라와 거의 동일하다.
끝까지 한번 둘러보고 자리를 잡는다. 푸드코트처럼 되어 있는 소박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생맥주를 먹는 사람들에게 끌렸다. 여행 가서 생맥주는 필수지. 아직 밥을 먹을 때는 아니라서 맥주 한잔 마시며 글을 써야겠다 생각하고 자리를 잡는다.
맥주 한잔이 100 루블이다. 환율 계산이 아직 잘 안된다. 대략 15를 곱하면 우리나라 돈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한잔에 1500원, 나쁘지 않다. 일단 한잔만 사서 자리를 잡는다.
여기 마음에 든다. 날씨 좋으면 낮에 커피 한잔 마시면서 책 보기에도, 저녁에는 맥주 한잔하며 식사를 하기에도 괜찮아 보인다. 거기다 고양이도 한 마리 있다. 근데 쟤는 길에 있을 고양이가 아닌데. 한국 길냥이들은 코숏만 있는데 여기는 설마 장모 러시안블루가 길고양이는 아니겠지.
한잔을 마시니 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은근히 취한다. 5시에 마시는 술은 애매하다. 분명 낮술은 아닌데 해가 너무 짱짱하게 떠 있으니 낮술의 느낌이다. 여기서 그냥 저녁까지 때울까 잠깐 고민하지만 첫날이니 최대한 탐험을 더 해야겠다 싶다. 그리고 티셔츠도 하나 정도는 사야 한다. 아 맞다. 비누 샴푸고 없구나. 일찍도 생각난다.
6시쯤 돼서 일어난다. 이제 시내 쪽을 한번 둘러보고 살 거 사고 저녁을 먹으러 한 번 찾아다녀봐야겠다. 해변에서 먹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첫날이니 그래도 예의상 좀 돌아다녀야겠다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맥주 한잔 했더니 화장실 생각이 간절해졌다.
일단 지도를 한번 펴본 후에 대충 방향만 잡고 걸어가 본다. 어차피 동네가 그리 크지 않아서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올 거 같다.
그런데 여기, 바닷가를 벗어나니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진다. 식당도 없고, 옷을 살 곳도, 심지어 비누를 살 곳도 안 보인다. 이 도시 뭔가 굉장히 희한하다. 편의점 이런 것도 단 하나도 없다. 있는 것은 블랙위도우 몸매의 여인들뿐이다.
겨우 시장 같은 곳을 찾아 화장실은 해결한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밥을 먹을 곳은 안 보인다. 슬슬 심각해진다. 첫날인데 저녁을 굶어야 하나. 여기 사람들은 외식도 안 한다냐. 그 흔한 식당 하나가 안 보인다. 한 시간 정도를 여기저기 둘러본 거 같은데 역시 식당을 닮은 곳 조차 없다. 근데 하도 얘기해서 그렇긴 하지만 여기 여성분들 몸매는 정말... 자꾸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다.
포기하고 굶어야 할까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때쯤 처음에 차 타고 지나가면서 본 아이리스 펍과 슈퍼가 눈에 들어온다. 그때 엘레나가 소개해줄 때는 이런 곳을 내가 왜 오냐 했는데 지금 보니 엄청 반갑다. 어쩐지 이곳을 굉장히 집중 있게 소개한다 했더니... 먹을만한 식당이 우리나라로 치면 호프 같은 곳뿐이라니 뭔가 슬프다.
일단 옆에 커다란 슈퍼 부터 들어간다. 비누랑 샴푸, 칫솔을 사야 한다. 다행히 이런 비스무리한 제품들을 모아놓은 코너까지는 찾았는데... 이게 또 복병이다. 영어로 그 흔한 Shampoo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게 없다. 모두 러시아어이고 오히려 한국어가 간혹 보인다. 그렇다고 여기서 한국 제품을 사는 건 좀 아니잖아...
다행히 샴푸는 2in 1이 적혀 있는 걸 발견하고 선택한다. 샴푸와 린스가 같이 있는 거겠지. 그래도 만국 공통어는 있었다. 바디샴푸는 정말 눈치껏 산다. 알고 보니 무좀약 막 이런 건 아니겠지. 에이 이제 나도 몰라...
벌써 7시 반이 넘었다. 물론 시차가 있으니 한국 시간으로는 6시 반이지만 이제 정말 배가 고프다. 더 고를 것도 없이 옆에 있는 아이리시펍으로 간다. 밖에 한국말도 쓰여 있고 한 게 딱 관광객용 같기도 해서 마음에 썩 안 들지만 어차피 선택권이 없다. 다른 곳이었으면 이런 데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맥주는 그래도 왠지 맛있을 거 같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메뉴를 본다. 여기가 러시아인지 우리 옆동네인지 모르겠다. 왠지 동네에 흔하디 흔한 호프집에 온 느낌이다. 좀 보다 결국 닭날개와 필스너 맥주를 하나 주문한다. 러시아까지 와서 닭날개 구이라니... 그래도 일하시는 분들은 참 아리땁... 자꾸 얘기하니 뭔가 변태 같지만 객관적인 얘기다. 뭐 그래 봐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만...
와이파이에 연결하니 사촌동생이 '거기 어때?'라며 카톡으로 묻는다. 어떻긴... 넌 나에게 똥을 줬어. 여기서 앞으로 4일간 뭐하지... 누군가 블라디보스토크는 3일이면 충분하다고 했던 얘기가 이해된다. 내가 아무리 조용한 곳을 좋아한다지만 그래도 토속 음식이라든가, 많은 여행자라든가, 하다못해 영어 할 줄 아는 현지인들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다행히 맥주는 꽤나 훌륭하다. 먹음직스러운 닭날개를 보고 기분이 좋아지지만 먹어보니 역시 우리 동네에 있을법한 호프집 느낌이다. 주구장창 맥주나 퍼마시다 가게 되려나.
아무래도 여기는 수동적인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곳 같다. 원래 하던데로 그냥 발 가는 데로 다니지 말고 내일은 검색도 좀 하고 능동적으로 찾아다녀봐야겠다. 그래도 첫날에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원래 여행지는 3일째에 자기 매력을 드러내는 법이지 않던가. 그리고 뭐 정말 할거 없으면, 진짜 책이나 잔뜩 보고 글이나 잔뜩 쓰고 가지 뭐. 그래도 핸드폰이 끊긴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맥주 한잔을 더 비우고 레페 한잔을 더 시킨다. 오늘 꽤 먹네. 역시 여행지에서든 일상에서든 이 법칙은 존재한다. 마음이 충만하면 안 마시지만, 아쉬우면 마시게 되는 법이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마셔야지.
홀로 마시는 것도 서러운데, 안주는 먹자마자 빈그릇을 싹 치워버린다. 이제 그만 가라는 건가. 내가 이게 싫어서 예전에 내 가게를 운영할 때도 음식을 다 먹어도 그릇을 그냥 놔두게 했었다. 그래 이만 가자. 어차피 시간도 어언 10시다. 11시까지 들어오라고 했으니 이제는 일어날 시간이다.
어두컴컴한 거리를 십분 정도 걸어서 호스텔로 돌아온다. 러시아 무섭게 느껴졌었는데 막상 와보니 치안은 의외로 좋다. 전반적으로 안전한 느낌이 난다. 인도에서는 해가 진 이후에 밖으로 다니면 현지인들이 위험하다고 걱정하며 막 빨리 가라고 했던 것과 비교된다.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스탭인 알렉스(이름은 언제나 자신이...)가 앉아있다. 이 친구 영어 잘한다고 했었는데. 좀 친해질까 싶어 반갑게 인사하는데 영 퉁명스럽다. 그래 너도 남자는 싫겠지. 네 맘 이해한다.
씻고 방으로 들어온다. 방에 아무도 없다. 불을 일부러 안 키고 자리로 온다. 오늘은 빨리 자야겠다. 그래야 내일부터 제대로 다닐 수 있을 거다. 뭐 내일이라고 좋은 일이 생길까 싶다만, 여행이란 항상 한 치 앞도 모르는 법 아닌가. 일찍 일어나서 내일 하루를 계획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결국 오늘 티를 못 갈아입었네... 내일은 꼭 티셔츠 하나 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