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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May 06. 2016

나홀로 4일 러시아 여행 -Day 2

알아가기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다. 아 맞다, 오늘 평일이지. 평소라면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해야 할 때이지만, 오늘은 다르다. 문득 내가 여행 중임을 새삼 깨닫는다. 아무리 조용하고 별거 없는 곳에 왔다 하더라도 여행을 온 것은 맞다.


도미토리의 사람들은 아직 한밤중이다. 지금 시간이 6시, 잠시 일어날까 고민하다 그냥 다시 자기로 한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더니 바깥도 영 흐려서 아침부터 싸돌아다닐 날은 아닌 거 같다.


대신 누워서 조사를 좀 한다. 어제의 경험을 교훈 삼아 최소한 식당이라도 미리 알아보고 다니기로 결심하였다. 다른 게 없다면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다니는 목표라도 있어야겠다. 예전 여행 다닐 때 많은 도움을 받았던 Trip Advisor에게도 이번에도 조언을 구한다. 찾아보니 식당은 많은데 막상 러시아식 음식을 파는 곳은 없다. 러시아는 보드카 말고는 자기들 전통 음식이 없는 걸까. 그 유구한 역사를 버텨온 나라인데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아직 못 찾고 있는 거겠지.

바깥이 계속 흐리니 일어나기가 영 귀찮아진다. 밍그적거리다가 결국 9시가 되어서야 숙소를 나선다. 첫 번째 목표는 Moloko & Med라는 카페다. 여기서 일단 아침을 먹을 생각이다.

하루 종일 비가 온다더니 막상 비는 오지 않는다. 다만 구름이 자욱하고 흐리다. 여기도 해안도시라 그런가. 날씨가 괴랄하다. 어제는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로 덥더니 오늘은 패딩을 걸쳐 입어도 약간 쌀쌀하다. 아 근데 티셔츠 사야 하는데...


지도를 보며 걷는다. 그래도 확실히 이틀째가 되니 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어제는 큰 그림만 보고 다녔다면 오늘은 디테일이 조금 더 보인다고나 할까. 물론 러시아 미녀들의 디테일도... 아 아침부터 그만해야지.

이곳 길의 특징이 있다. 일단 일방통행이 굉장히 많다. 둘째로 신호등은 메인 사거리 정도에만 있다. 신호등은 언제 바뀔지를 미리 알려줘서 기다릴 때 조급하지 않게 해준다. 신호등이 없는 나머지 거리는 그냥 지나가면 차들이 멈춘다. 그리고 차들이 생각보다 엄청 잘 멈춘다. 러시아인들이 무뚝뚝해 보이지만 하루 경험해본 바로는 막상 다가서면 따뜻한 친절함이 느껴진다. 물론 하루를 겪고 뭘 알겠냐만...

하늘이 계속 흐리더니 얼굴에서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거 아무래도 우산을 사야겠다 싶다. 지나다니면서 보이는 가게마다 가서 우산이 있냐고 물어본다. 물론 umbrella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으니 손으로 우산 피는 시늉을 하며 비를 손가락으로 형상화해본다. 이게 그리 알아듣기 어려운 마임일까. 그래도 끈기를 가지니 이해를 하지만 파는 곳이 없다. 우리나라는 비 오면 사람들이 어디선가 나와서 길에서도 막 파는데 여기는 정말 이런 일반 용품을 파는 곳을 찾기 힘들다. 우리나라가 과한 걸까, 아님 다른 나라들이 무심한 걸까.

그래도 목표로 했던 카페는 잘 찾아온다. 비는 올 듯 말듯 하더니 결국 오지는 않는다. 오늘 하루 종일 이 정도라면 생각보다 괜찮을 거 같다. 카페를 보니 10시부터 시작이라고 적혀 있다. 지금이 딱 10시다. 일찍 안 나오기 잘한 셈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아침 세트를 주문한다. 400루비니 6천 원 정도다. 어제 계산해보니 대략 15를 곱하면 한국돈과 같다. 어차피 이곳은 액티비티도 없으니 먹는 데는 돈을 굳이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하루에 5만 원을 잡았으니 식사로 생각해도 꽤나 여유로운 돈이다.


아침부터 손님들이 꽤 온다. 나름 고급 카페 같은데 오늘 같은 평일에 오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일까? 다 사연이 있겠지.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자연스레 키보드를 편다.

프렌치 스타일로 주문한 조식 세트는 매우 만족스럽다. 오믈렛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 부드럽게 하지. 나도 요리 좀 하는 편인데 확실히 전문가는 다르다. 토스트도 바삭하면서도 고소한 게 최고다. 하지만 가장 압권은 크루아상이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크루아상은 뭐였지. 겉은 바삭하면서 안에는 푹신푹신한 게 매우 고급 지다.

이 동네에서는 2가지만 목표로 삼았다. 하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근처에 있다는 섬에 가보는 거, 두 번째는 케이블카 비스무리한 놈을 타고 어제 오면서 봤던 산 정상으로 가는 거다. 그 시간 이외에는 책이나 보면서 음식점 탐방이나 하고자 한다. 그래도 이제 좀 자리를 잡는 느낌이다.


책은 오면서 2개를 준비했다. 하나는 항상 보고 싶었던 사피엔스, 다른 하나는 저번 여행에 만났던 홍콩 처자가 최근에 페이스북으로 나한테 꼭 읽으라고 권했던 SHANTARAM이다. 하나는 인문과학, 하나는 소설이다. 일단 SHANTARAM으로 시작해볼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최근에 읽던 심심풀이용 책 하나를 여기서 모두 읽어버린다.

여행을 오면 늘 느끼지만, 왜 한국에서는 이런 삶이 쉽지 않을까 싶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이 내 모토인데 여행은 일상처럼 해도 일상을 여행처럼 보내는 건 은근히 쉽지가 않다. 만약 이번에 여행을 안 왔다면 주말 내내 방에서 뒹굴 거리며 술이나 마시고 잤을 거다. 어제만 해도 피곤해서 오지 않고 쉬고 싶지 않았던가.


사실 달라지는 건 마음밖에 없다. 이 동네나 내가 사는 동작구 대방동이나 다를 건 없다. 오히려 여유를 즐기기에는 현재의 일상이 조건이 더 좋기도 하다. 문제는 심적인 여유겠지.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고 살아도 여러 스트레스가 쌓이면 결국 여유를 잃게 된다.


여유를 잃는 가장 큰 이유 중에 또 하나가 '걱정'이라 생각한다. 이전에 봤던 '내가 알고 있는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책에서 칠팔십 대 어르신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가 걱정은 무의미하다는 거다. '걱정'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바꾸는 것은 대책과 준비다. '걱정'은 그저 내 마음의 한 부분을 앗아갈 뿐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막상 그걸 없애는 게 힘드니 나도 일상에서 여유를 잃어가는 거겠지.


밖에서 비가 슬슬 오기 시작한다. 이곳의 비는 뭔가 애매하다. 우산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안개비다. 그래서 우산을 안 파는 걸까? 실제로 우산을 쓴 사람은 거의 안 보인다. 그래도 나가기에는 좀 애매하다. 그냥 여기서 점심까지 먹을까. 시간도 어느새 12시가 되어간다.


이때 호스트인 엘레나한테 메시지가 온다. 어디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지금 어디냐고 묻는다. 카페 이름을 얘기하니 금방 데리러 오겠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혼자 있는걸 좋아하긴 하지만 어차피 비도 오고 우산도 없어서 애매했는데 잘 됐다.

조금 기다리니 엘레나가 온다. 나랑 한 살 차이인데 완전 모델의 몸매를 하고 있는 유부녀 엘레나다. 누가 러시아 여자들이 결혼하면 몸매가 망가진다도 했던가. 그냥 여기 정착해버릴까.


계산하고 같이 차로 가니 남자 3명이 기다리고 있다. 아마 오늘 호스텔에 숙박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모두 러시아인이다. 영어는 한명만 짧게 하지만 반갑게 인사한다. 근데 나는 그렇다 쳐도 러시아 사람들은 여기로 여행을 왜 오는 걸까. 부산 같은 곳이려나.

우리를 태우고 엘레나는 다시 그 정상으로 간다. 새로운 사람은 거기 꼭 데려가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물론 지금 날씨에는 한 치 앞도 보일 리가 없다. 다 같이 내려서 잠시 보지만 휘몰아치는 바람에 서로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차에 올라탄다. 이 비를 뚫고 걸어올 라온 동앙 여자가 하나 보이고 살짝 말을 걸어볼까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차에 오른다. 역시 태어나서 여자한테 연락처를 먼저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순수남 답다. 회사의 동생들이 최근에 나보고 맨날 헌팅 좀 해보라고 난리인데... 난 안돼...

이동하는 내내 러시아 말로 서로 뭐라 뭐라 한다. 이분들도 은근 수다스럽다. 말만 통하면 좀 친해져 보겠지만 언어의 장벽이 참 크다. 그나마 영어를 하는 게 엘레나뿐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워낙 착한 엘레나라서 불안하지는 않다. 근데 티셔츠는 언제 사지... 오늘도 이 셔츠 하나로 버텨야 하는 걸까. 잠옷까지도. 한벌만 더 가지고 올걸. 누가 이런 곳인 줄 알았나.

짙은 안개를 재치며 가던 차는 어떤 시장 같은 곳에 멈춘다. 엘레나가 여기가 fish market이라며 따라와보란다. 내려보니 웬 재래시장의 느낌이 나는 곳이다.


그중 한 곳으로 따라오라고 한다. 들어가 보니 잡다한 것들을 파는데 그중 빨간 알이 눈에 들어온다. 이거, 혹시 캐비어인가? 엘레나한테 물어보니 영어로 모르겠다며 사진을 찾아봐주는데 캐비어가 맞다. 여기가 싸다며 어차피 살 거면 여기서 사라고 한다. 안 그래도 기념품으로 사갈까 생각했는데 잘됐다. 비행기에 가져가야 하니 통조림으로 3개 산다.

그 옆에 가게에서는 소금 초콜릿을 열개 산다. 이게 서울 가서 기념품으로 나눠주기 딱이다. 이것도 원래는 50 루비인데 여기서는 35 루비란다. 이렇게 기념품은 장만 완료!

또 어딘가로 출발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빨간색으로 지어져 있는 아파트 같은 곳이 많이 보인다. 특징은 저층은 슈퍼마켓 같은 상가로 이용된다. 일종의 주상복합인가? 지금 내가 머무는 호스텔도 그런 형태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바람이 몰아치는 한 해변이다. 엘레나가 설명해주기를 여름에 매우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일단 바다니 좋긴 한데 사실 해변은 그저 그렇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춥지 않은 겨울 바다를 보는 것 같아서 나쁘지 않다.

바다를 잠시 구경하다 춥다며 그 앞에 '크루즈'라는 카페로 간다. 러시아에서는 카페와 식당의 구분이 없어 보인다. 어차피 몇 개 안되니 커피도 팔고 음식도 팔고 술도 파나보다. 카페의 분위기가 그리스 풍이다. 어릴 때 그리스에서 살았어서 그런지 뭔가 친숙한 기분이다.

모두 자리에 앉고 잠시 통성명을 한다. 영어를 조금 하는 애는 예카트린부르크에서 온 마크이고, 좀 수다스러운 친구는 사할린에서 온 알렉시, 그리고 약간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분은 바이칼호수쪽에서 온 게하라고 한다. 서로 자기 동네 얘기를 좀 하는데 특히 사할린에서 온 알렉시는 상당하다. 자기가 찍은 거라며 곰이 수영하는 동영상을 보여준다. 진짜 러시아에서는 곰이 막 있나 보다. 상어 잡은 사진과 캐비어를 국자로 퍼먹는 사진도 보여준다.

바이칼 호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라고 한다. 러시아 곳곳의 얘기를 듣다 보니 여기도 장기로 여행 오기 괜찮은 곳 같다는 생각이 든다. 블라디보스토크도 여기만 와서 그렇지 다른 곳과 연계되어서 왔으면 괜찮았겠다 싶다.

다른 친구들은 차를 마시고 마크와 나만 식사를 한다. 나는 양고기를 먹는다. 맛은 사실 그럭저럭이다. 내가 워낙 양고기를 좋아하니 그래도 먹을만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식사가 끝나니 바로 또 이동이다. 여행 다닐 때 동행이 생기면 이게 항상 문제다. 바다를 보면서 책도 보고 생각도 좀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번거롭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나는 근본적으로 혼자임을 더 즐기는 것 같다.

다시 출발한다. 아마 돌아가는 거겠지? 이후의 스케줄이 어찌 되려나? 말이 잘 안 통하니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흘러가는 데로 두면 항상 어떻게든 여행은 진행이 되는 법이다. 근데 아침에 새운 계획은 사라지는 건가? 뭐 내일도 있으니 큰 상관없다.


졸려서 잠깐 눈을 붙이고 보니 두 명이 내린다. 어디 쇼핑하러 간단다.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같은 게스트하우스니 나중에 보겠지? 나보고 쇼핑할 거냐고 해서 나는 원래 쇼핑은 안 한다고 얘기해주고 다시 살짝 잠든다. 왜 이리 피곤하지. 늙었나.


차는 조금 있다 호스텔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하긴 어디를 가겠나. 어차피 조금 피곤해서 한숨 잘까 싶었다. 내릴 때도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다. 오늘은 진짜 하루 종일 비가 오려나보다. 이러다 저녁 먹으러도 못 나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방으로 들어와서 책을 보다 잠깐 잠이 든다. 한 시간 정도를 잔 거 같은데 정말 푹 잤다. 한 거 없이 왜 이리 피곤하지. 뭔가 이번 여행은 계속 핀트가 안 맞는 거 같다.


장기 여행이 마라톤이라면, 단기 여행은 백 미터 달리기라는 사실을 이번에 깨닫는다. 마라톤은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지만 백 미터는 그딴 거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스퍼트다. 마라톤은 한번 삐끗해도 만회할 수 있는 게 많지만, 백 미터는 한번 삐끗하면 그걸로 끝이다. 4일 여행 오는걸 두 달 여행 오는 거와 똑같이 했으니 어려운 게 정상이다. 조금 더 조사를 하고 왔어야 했지 싶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조금 안전하게 돈을 좀 쓰자는 생각이 든다.


7시인데 밖을 보니 비가 더 거세졌다. 이거 우산 없이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리셉션에 가보니 엘레나는 그새 사라졌다. 리셉션에 있는 여자 스텝에게 우산을 빌릴 수 없냐고 온갖 수신호를 동원하여 물어보는데 못 알아듣는다. 결국 지나가던 러시아인의 도움을 받아 우산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그래도 저녁은 맛있는 것을 먹고 말테다!

비를 해치고 해변 쪽으로 걸어간다. 오늘 목표로 하는 곳은 첫날 저녁에 메뉴를 보고 비싸다고 넘긴 Zuma 식당이다. 대략 보아하니 실패하지는 않을 곳 같다. 비가 꽤나 거칠다. 차들이 지나가며 흙탕물이 몸에 다 튄다. 아 난 왜 여행 오면 항상 이렇게 처절해지는 걸까. 사실 택시를 타면 되는데 이렇게 짧은 곳을 택시를 타고 가기에는 마음이 안 내킨다. 서울에서 후배들이나 친구들한테는 한 끼에 십만 원이 넘는 식사도 아깝지 않게 사주면서 왜 나한테 쓰는 3천 원은 이리 아깝게 느껴지는 건지... 어머니한테 받은 가정교육의 결과일까.


어렵사리 Zuma에 도착한다. 역시 위화감이 드는 곳이다. 난 돈을 떠나서 이렇게 위화감이 드는 곳이 싫다.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구분되는 이런 분위기가 싫다. 자본주의의 끝을 보는 이런 분위기가 싫다. 동네 한편에서 푸근한 사장님의 인정 넘치는 서비스와 서민 같은 분위기에서 마시는 소주 한잔이 좋다. 그래도 오늘은 여기다.

들어가는데 잠바를 맡기란다. 저기... 이 안에 이틀간 안 갈아입은 반팔 티셔츠 밖에 없는데... 무조건 벗어야 한단다. 이건 뭔 법칙일까. 그래 알았어요. 냄새 나도 내 잘못 아니다. 패딩 잠바를 벗어주고 늘어진 흰색 티셔츠를 한 장 입고 안으로 들어간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오늘 잠옷도 결국 얘다.


메뉴를 본다. 오늘은 돈을 쓸 거다!라고 다짐하지만 만원이 넘는 메뉴에서는 자꾸 흠짓흠짓 거린다. 여기는 유명한 식당이라 온갖 나라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데 막상 러시아 음식은 잘 안 보인다. 메뉴는 한글로 주는데 이거 번역한 사람 찾아오고 싶다. 요즘 욕먹는 베트남 슈퍼맨의 번역이 백배 낫다.


메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싸움을 하다 결국 초밥 한 접시를 주문한다. 초밥을 원래 좋아하는데 여기는 왠지 맛이 괜찮을 거 같다. 약 1.5만 원이다. 3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두근거리며 쳐다보지만 결국 못 시키고 타협한 결과다. 나 돈 그리 못 버는 거 아닌데... 그래도 사치를 하는 건 항상 꺼려진다. 스시와 함께 이곳에서 만들었다는 맥주도 하나 주문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 완전한 하나의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처음에는 온전하던 영혼이지만 살면서 조금씩 타협하면서 우리는 그 영혼을 연료로 쓰게 된다. 문제는 다른 부분과 달리 이 영혼은 재생이 안된다. 깎이면 그 뿐이다. 이번 한 번만 타협하자, 다음부터는 괜찮아, 이리 생각하지만 이미 그때 영혼은 그만큼 깎여있다. 그러하기에 영혼이 깎이는, 타협하는 행동에 나는 매우 조심해한다.


그런 타협은 주변에 널려 있다. 운동을 갈지 말지와 같은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회사에서 여자 나오는 술집을 가냐 마냐까지 다양하다. 항상 그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깎이게 되고 나중에 보면 내가 그때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니 내가 변했기에 깨닫지도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좀 과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돈을 쓰는 것이 이런 행위에 들어간다. 돈은 필수악이라고 나는 여긴다. 예전에 사업을 할 때 절대 직원보다 월급을 더 받지 않겠다는 원칙을 정했었다. 직원들이 가져가는 월급 자체를 체감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꼭 돈이 행복과 직결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있다. 돈으로 사는 행복은 쉬운 행복이다. 정말 깊은 행복은 절대 돈으로 사지 못한다. 사치를 하며 돈을 쓰다 보면 결국 중요한 나 자신은 잊게 되고 돈을 추구하며 세상과 타협하는 내가 남을까 두렵다.


그 생각을 하며 남은 돈을 계산해보니 8000 루비 이상이 남아있다. 이런, 이러다 다 쓰지도 못하고겠다. 더 먹어야지. 메뉴를 달라고 하고 참치회를 하나 더 주문한다. 그래도 환전한 건 다 써야지!

초밥이 나왔다. 한입 먹어본다. 이 퓨전한 맛은 뭘까. 도대체 초밥에 왜 과일을 첨가한 거야. 초밥 위에 오렌지를 올릴 생각은 도대체 어느 놈 머리에서 나온 걸까. 초밥은 자고로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게 중요한데 이건 신맛, 단맛이 어우러져 초밥이라 부르기 애매하다. 베트남의 쌀국수를 한국에서 먹을 때의 느낌이다. 아... 역시 잘 풀리는 게 없구나.

그나마 맥주는 꽤나 괜찮다. 내일은 차라리 스테이크를 먹을까 싶다. 설마 스테이크가 실패할 수는 없겠지.

참치가 나온다. 이것도 맛이 좀 애매하다. 그래 이런 건 일본 가서 먹자. 뒤늦은 깨달음이다. 그래도 선입견을 버리고 먹으니 꽤나 괜찮다. 맥주 작은걸 하나 더 주문한다.


여기 들어올 때 9시까지는 나가라고 했었다. 예약이 많은 곳인가 보다. 혼자 천천히 먹다 보니 어느새 9시가 되어가고 있다. 계산서를 달라고 하고 나온다.

일주일 전에 왔던 동생이 나보고 문샤인 바라는 곳을 꼭 가라고 추천했었다. 한번 가볼까 싶다. 동생하고 친하기는 하지만 사실 성향이 좀 달라서 맞을까 우려도 되지만 이런 곳 아니면 내가 언제 바를 가보겠나. 저녁거리를 혼자 터벅터벅 걸어서 문샤인 바라는 곳을 찾아간다.

이 바 입구부터 마음에 든다. 간판도 없고 그저 달의 사진만 떡하니 있다. 내가 늘 얘기하는 엣지가 있다. 헌데 문제는 안에 사람들도 다 엣지 있어 보인다. 패딩에 늘어진 티셔츠만 입고 있는 내가 들어갈만한 곳인지 심히 우려되지만 그냥 쓱 들어가 본다. 설마 물관리는 안 당하겠지. 그래 봤자 바인데.

어두컴컴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가 처음부터 시선을 잡는다. 혼자 왔으니 바에 앉아 자리를 잡는다. 일하는 남녀들이 다 훈남훈녀다. 뭐 러시아에서 뭘 더 바라리. 훈남훈녀 아닌 게 더 어려워 보인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바텐더가 한 명 있다. 머리는 삭발인데 수염만 멋들어지게 기른 남정네다. 러시아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리 반갑다. 메뉴를 주는데 내가 뭐 아나. 하나 추천해달라고 하니 내가 좋아하는 취향을 말하라고 한다. 그래서 강하고, 달지 않고, 남성스러운 것을 하나 달라고 한다. 그러니 그러면 당연히 마티니라면서 뭔가를 막 멋지게 섞어서 준다. 아 이 분 뭔가 마음에 든다.

작은 잔에 나온 마티니는 강하지만 넘기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마음에 든다. 바는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려 온다는데 나는 이 술이 좋아서 올지도 모르겠다. 헌데 이 전체 바에서 혼자 온 사람은 나 혼자다. 아님 혼자 왔지만 혼자 마시는 사람은 나 혼자 인지도? 뭐 어차피 뭘 기대한 건 아니다.


슬쩍 지난주에 왔던 사촌동생을 기억하냐고 물으니 기억한단다. 못할 리가 없지. 계속 아무 술이나 달라고 했던 여자로 기억한다. 지선아... 너 뭐하고 간 거니. 그런데 여기 분위기를 보니 지선이가 여자친구들 3명 하고 왔으면 엄청 인기 있었겠다. 물론 같은 핏줄인 나는 쭈그리다.

어느새 첫 잔을 비우고 둘째 잔을 달라고 한다. 만드는 장면 자체가 멋져서 자꾸 주문하게 된다. 이번에는 조금 더 달달하고 시큼한 걸로 달라고 한다. 잠시 고민하더니 또 이것저것 섞기 시작한다. 신기한 게 후추도 넣는다. 그리고 작은 잔에 넣어서 준다.

한입 먹어보니 완전 마음에 든다. 칵테일을 좋아한 적이 없는데 오늘부로 빠질 거 같다. 헌데 홀로 멍하니 있으려니 이건 적성에 안 맞는다. 좀 눈치가 보이지만 키보드를 꺼내본다. 어차피 뭐 언제나 혼자였던 거, 글이라도 같이 해야지 좀 낫지.


내일도 마무리는 여기서 할까? 사람들과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냥 이 분위기 자체는 마음에 든다. 왠지 한국 가서도 바를 가볼까 싶기도 하다. 저녁에 홀로 바에 가서 가볍게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한국에 바에 가면 또 막 여자 만나고 그런 곳이려나. 그런 건 싫은데...


문득 앞으로 여행 다닐 때는 좀 꾸며볼까 싶기도 하다. 원래 여행 다닐 때는 최대한 자연의 모습으로 다니고자 한다. 뭔가 하나의 고집이랄까... 나에게 여행은 나 자신을 찾는 과정이기에 그 순간마저 나를 포장하고 싶지 않다는 자세일 수도 있겠다. 헌데 또 그게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사람들과 어우러지게 되는데 나만 생각하고 나만의 세상을 고집하는 것도 편협된 생각일 수도 있다.


소신을 가지고 혼자만의 생각을 추구한다는 것은 좋은 거다. 하지만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서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타협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지만 요즘 '타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정말 나만의 가치를 추구하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결국 나도 평범한 사람이 아닐는지. 소신을 추구하는 것은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희생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희생하지 않을 상황이 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특히 내가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굉장히 정형화되어 있는 곳이다. 돌이 튀어나오길 바라는 곳이 아니라, 튀어나온 돌을 깎으려는 곳이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다. 모두가 원하는 걸 수도 있겠다. 오늘 하루,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의미 있었으면 할 뿐이다. 복잡한 거 아니다. 나로 인한 의미든, 다른 누군가로 인한 의미든 의미만 있으면 된다. 헌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의미라는 거 자체가 사람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그걸 묻는 사람도 어느 순간 피곤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어찌 보면 중요한 시점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협을 할까, 고집할까. 무엇을 선택하든 오롯한 내 선택이었으면 좋겠다.  살다 보면 진정한 내 선택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항상 깨닫게 된다. 정말 자기 선택인 게 얼마나 될까. 매트릭스에 나오는 causality에 대해 동의한다. 우리가 하는 선택은 어떠한 인과관계에 부딪쳐 있다. 이걸 극복하고, 즉 관성을 벗어나서 자기 생각을 한다는 건 큰 용기도 필요하지만 벗어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세 번째 잔을 시킨다. 중간에 다른 칵테일이 이뻐 보이길래 그걸 달라고 했더니 이 바텐더 삐졌다. 저런 겉으로만 이쁜걸 먹겠냐고 되물어본다. 내가 잘못했어요. 깊이가 있는걸 주세요. 이 바텐더가 만드는 건 모두 메뉴에 없는 거란다. 내 요구를 듣고 자기가 그때 그때 만들어서 주는 거란다. 어쩐지 괜찮더라...

이제 자리가 부족해서 한쪽 켠에 찌그러진다. 근데 그 한쪽면이 정중앙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하지만 적당히 취하니 다 좋아 보인다. 보드카는 기분을 좋게 한다는 바텐더의 말에 동의한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다. 마구 마시면 문제지만 오늘 같이 마시는 건 기분 좋다. 근데 이렇게 바에서 혼자 마시면서 기분 좋게 취하는 건 거의 처음인 거 같다. 내일도 와야지~ 글은 솔직하니 취해서 쓰는 글은 취한 티가 나야 정상 아니겠는가.

옆의 둘둘 커플은 계속 원샷을 하며 신났다. 여기 원샷은 모두 칵테일이다. 작은 잔에 층을 만들어서 한 번에 마시게 한다. 야 이거 멋지다. 근데 이것도 그때 그때 만드는 느낌이다. 갑자기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외로운 거지 뭐.


이제 10시 반이다. 11시까지 돌아오라고 했으니 슬슬 돌아가야 한다. 가기 싫네... 내일 또 와야겠다. 아무도 반기는 사람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 좋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좋은 곳을 처음 만났다. 역시 마음을 여는데는 며칠이 걸리나보다. 나도, 도시도, 그곳의 사람도.


계산을 하고 나온다. 거리는 그새 어둑어둑하다. 시간이 10시 반이니 당연하다. 이곳에 와서 깨진 편견 중에 하나가 러시아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모르겠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정말 안전하다는 느낌을 언제나 받는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정말 착하다. 저녁 늦게 길에 사람이 있어도 내가 그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거보다 왠지 그 사람들이 나를 더 무서워하는 거 같다. 효도르 같은 외모에 속지 말자. 정말 순박한 사람들이다.

구글 지도를 보니 숙소까지 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중간에 길이 끊겨있다. 굉장히 애매하게 끊겨있다. 저런 정도면 근처 가서 담 한번 넘으면 될 거 같아 보인다. 일단 한번 가볼까?


가보니 철도이다. 양쪽으로 길게 철길이 놓여있는데 내가 갈길은 오른쪽이다. 여행 와서 위험한 거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이미 철길로 들어가 있다. 취해서 그런가? 그래도 한쪽으로 여유길이 많아서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나 엄청 겁 많은 사람이라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절대 안 들어간다.

이제 반데 편으로 나 있는 길만 찾으면 된다. 그러기만 하면 되는데... 한참을 가지만 이 곳은 터널처럼 양옆이 깊이 파여있어서 나갈 통로가 안 보인다. 십 분여를 가다 돌아선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도 없는 철길 옆 자갈길을 러시아에서 저녁 11시에 걷는 건 아니다.


아 먼길을 결국 돌아가야 하는 건가. 일단 터벅터벅 왔던 길로 돌아온다. 언제나 그렇지만 갈 때는 한참이지만 돌아올 때는 금방이다. 출발점으로 와서 어쩌지 고민하고 있는데 현지인 들이(역시 쭉빵...) 철길을 건너 건너편 길로 들어간다. 어라? 길이 있네?

나 뭐한 거지... 나도 그 길을 따라간다. 넘어가니 바로 익숙한 길이 나온다. 그래, 그 무서워 보이던 철길은 추억으로 삼자. 여행 와서 그 정도 삽질은 필요하지.


나머지 길은 매우 익숙하다. 이틀이 지나니 드디어 마음이 열렸나 보다. 세상에 3일로 충분한 도시는 없다. 모든 도시는 최소 일주일을 보낼 가치가 있다. 짧았던 내 생각에 반성을 해본다.

숙소로 돌아오니 알렉스가 날 반겨준다. 어제는 퉁명스러워 보이더니 오늘은 친절하다. 사람을 한순간에 판단하면 안 되는 이유다. 묻지도 않았는데 내일 주말장이 열린다고 꼭 가보라고 한다. 앗! 그러면 티셔츠 드디어 살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오늘은 역시나 단벌 신사다. 자! 3일째 같은 셔츠를 입고 낮과 밤을 다니고 있다. 이 정도는 돼야 내 여행 스타일이지. 대충 얼굴과 발만 씻고 침대에 눕는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깨끗하긴 글렀다. 그래도 오늘은 뭔가 기분이 좋다.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여행은 이제 반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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