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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Aug 03. 2015

우리는 과연 특별할까?



형들에 의해 팔려가는 요셉. 출처: St-Takla.org




너는 요셉의 축복을 타고 태어났단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귀가 닳도록 나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요셉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지만 그 힘든 곳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으로 총리대신까지 오른 인물이다.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며 만인들에게 사랑받은 요셉의 그 축복이 나에게 깃들었다고 진심으로 믿으셨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냥 넘기던 나도 어느 순간 믿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은 종교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이 영향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항상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하기에 이사를 많이 다니며 친구 하나 없던 어린 시절도, 아프리카 등지에서 살다온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배경으로 인하여 소외되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암흑기에도 항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항상 높았고 그 자존감에 맞추고자 공부도 그럭저력 하여 괜찮은 학교도 가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결과만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자존감의 그림자에서 거만함이 스며들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특별한' 내 밑으로 보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한 유치원 선생님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항상 나의 특별함을 내 주위 사람들에게 확인 받고 싶어했다. 역시나 그녀에게도 그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제잘난 맛에 살던 나에게 당시에 잊지 못할 현명한 대답을 주었다.



"나 똑똑하지 않아?"


"오빠 똑똑하지.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은 똑똑해. 다만 그 똑똑한 분야가 달라서 부각이 안될 뿐이야."



그녀가 얘기했던 것은 '개성'이라 칭할 수도 있고 '적성'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은 태어날때 자기만의 '잠재적 특별함'을 안고 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잠재되어 있는 특별함을 모두가 끄집어 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영역을 찾아낼 때야 비로서 그 특별함이 세상에 나타난다. 그 특별함이 '머리가 좋은 것'인 사람은 사회적으로 그 영역이 넓기에 능력이 드러나기 쉽지만 모두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종이접기'를 잘하는 특별함은 자신의 자리를 찾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찾지 못하고 평범함 속에 사라진다. 나는 특별하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이도 특별하다. 그녀의 그 한마디로 나는 나만이 다르다는 오만을 어느 정도 접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회사를 취직하였고, 퇴사를 한 후 창업을 했으며, 6년간 열성을 다 해 운영했던 그 사업에서도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였다. 사업의 실패로 전재산은 거진 무일품이 되었으며 앞으로의 인생도 막막해졌다. 이 정도면 자존감이 낮아질 만도 하건만, 나는 오히려 더 뚜렷하게 내가 특별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다음 인생을 계획하고자 떠난 나만의 배낭여행에서 나는 내 존재가 이 세상에 유일하다는 것을 오히려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고, 그 존재의 정신과 가치의 특별함을 믿게 되었으며 그 믿음을 따르는 길만이 행복으로 향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제 내가 아끼는 친구와 만나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내 앞날에 대한 조언을 청했다. 현실적인 성향의 그 친구는 반대로 사람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들려주었다. 자기가 특별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거에 얽매여서 완벽한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아까운 인생의 시간을 허비하며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회에 순응하면서 사는 삶도 충분히 의미가 있으니 꼭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는 벗어나라고 조언을 했다.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타협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끝까지 자신만의 꿈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다 결국 가족과 주위 사람들마저 불행하게 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기에 틀린 말은 아니다.


오늘 하루 곰곰이 그 친구의 말을 곱씹어 봤다. 허나 생각해보니 문득 자신을 타협한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가 만나 사랑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자연의 신비를 경험하였고, 또 그 아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행복함을 얻고 있다. 가족을 위하여 회사가 주는 미칠듯한 스트레스를 오늘도 견디는 희생의 삶도 살고 있다. 이런 삶을 어찌 특별하지 않다 할 수 있겠는가.


특별한 삶이라는 것은 생각해보면 '소수의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는 다수와는 다른 독특한 삶을 사는 사람들만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에서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나 세상을 바꾸는 기업을 운영한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하다고 얘기하지만 꼭 그들만이 특별한 걸까. 양육을 결정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 요즘의 젊은 어머니나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는 아버지들도 한편으로는 모두 다 특별하다.




특별한 삶이란 선택의 삶이다.


나는 특별한 삶이란 '선택의 삶'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타협의 순간이 왔을 때 타협이 아닌 선택을 하는 것이 자신의 특별함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결과는 같지만 과정이 다르고 또 내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양육해야 할 아들이 생겨서 자기의 꿈을 포기해야 한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아들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그로 인한 나의 행복을 위하여, 가정을 위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은 특별하다.


어떤 삶을 사느냐를 떠나서 '선택의 삶'을 사는 모든 이는 특별하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자기 안의 소리를 듣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여전히 내가 특별하다고 믿을 생각이다. 이 특별함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특별함을 잃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내 안의 목소리를 들으려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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