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난임부부 20~30%가량은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얼른 마우스 휠을 반복적으로 돌리면서 이리저리 나의 수치들을 살핀다. 마우스 휠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선생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기분인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피검사 수치, 호르몬 수치, 배아 등급 등 모든 데이터들은 보면 볼수록 '이게 왜 안되지?'라는 질문을 증폭시킬 뿐, 인공수정 2회, 시험관 11회 약 3년 동안 임신이 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할 텐데. 선생님에게 묘한 동정심이 생긴다. 3년을 다니던 병원 전원을 결심했던 이유도 전 담당 선생님의 난감한 눈동자 때문이었는데 새로운 선생님이라고 별 수 없나 보다.
보통 난임부부의 20~30%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의료 기록 증명서 속 '상세불명', '기타 요인에서 기원한'이라는 표현이 우리가 이 20~30% 에 해당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치 선캄브리아대-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이어지는 지질 시대 구분처럼 말이다.
먼저, 꽃밭기는 난임 병원에 다니기 시작해 인공수정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난임 병원에 갓 입학해 남편도 나도 떨리는 마음으로 다양한 검사를 진행했다. 난임이 아닌 불임이면 어쩌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으면 어쩌지 부정적인 쪽에 무게의 추를 몰아 놓고 있을 때 '문제없음'이라는 결과가 매우 달콤하다. '둘 다 건강하다니, 큰 문제없다니! 다행이다. 둘 다 잘 살았구나. 조금만 도움 받으면 금방 되겠는걸?'이라며 희망과 감사를 품는다. 머릿속에 꽃밭이 가득하다. 처음 배에 놓는 주사도 시간 맞아 넣어야 하는 질정도 그저 이벤트 같다. 기꺼이 이 정도는 경험해 볼 수 있지! 라며 으스대기도 한다. 인공 시술 한 번의 성공률이 25~30% 임을 감안하면 3번 안에는 성공할 거라 희망 아니 자신하고 있었다. (꽃밭기라 쓰고 자만기라고 읽어야겠다.)
하지만, 인공수정 2회차도 소득 없이 막을 내리자 마음이 조급하기 시작했다. 3개의 하트 HP 중 2개가 벌써 깎인 게임 캐릭터 같았다. 나에게 남은 목숨은 하나! 이때부터 두 번째 시기 '주마등기'가 시작되었다. 분노기의 가장 큰 특징은 원인이 될 만한 과거의 행동과 사실들을 곱씹는다는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새 학교에서 다니면서 축적된 환경호르몬 때문인가? 역시나 술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인가? 야채곱창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고질적인 염증을 너무 늦게 치료했기 때문인가? 활력과 매력이 넘치던 시기에 너무 잘 놀아서 그런가? 덜컥 고양이를 입양해서 새 식구가 들어올 복을 찼다는 점쟁이 말이 맞는 건가? 과거에 내가 한 모든 생각, 추억, 행동을 주마등 스치듯 꺼내어 오늘의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인과 관계가 납득되기에는 나의 과거 병력은 이미 말끔하게 해소되어 있었고 특정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난임인 경우가 많았다는 사례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술과 곱창 그리고 사랑을 즐기는 사람들도 충분히 부모로 살고 있으며 고양이와 아기가 함께 성장하는 집도 많았다. 결국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나만 왜?'라는 분노는 안으로 향했고 그 분노를 견디다 못한 나는 삼십육계 줄행랑 전략을 세우게 된다.
'나 안 해!!!' 그렇게 반년동안 잠시 휴식기(a.k.a 회피기)를 가지게 된다.
다시 난임 시대로 복귀하면서 과거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원인이 뭐가 되었든 내가 난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다가올 시험관 시술을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냉철한 이성적 사고를 가진 데카르트기이다. 명확한 인과관계에 따른 결정, 감정적인 동요의 최소화가 이 시기 나와 남편의 모토였다.
case 1)
명제 1. 인공수정이 실패했다. 이는 수정이 되지 않았거나 or 착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제 2. 임신하기 위해서는 조건 A(수정) and 조건 B(착상)가 모두 이뤄져야 한다.
명제 3. 시험관 시술을 통해 조건 A(수정)를 충족시킬 수 있다.
결과 : 고로 시험관 시술을 하면 실패 조건을 하나 소거할 수 있으니 임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case 2)
명제 1. 시험관 시술에 실패했다.
명제 2. 나는 비타민 D 수치가 낮다.
명제 3. 비타민 D는 자궁내막을 강화한다.
결과 : 비타민 D를 섭취한다면 임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case 3)
명제 1. 시험관 시술에 계속 실패했다. 수정란이 착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명제 2. 비타민 D 수치도 정상범위이다.
명제 3. 건강한 수정란은 착상이 될 확률이 높다.
결과 : 건강한 수정란을 선별하기 위해 PGS(염색체 선별 검사)를 한다면 임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case 4)
명제 1. 시험관 시술에 또 실패했다. PGS를 한 건강한 수정란도 착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명제 2. 담당 선생님의 처방 및 방식에 큰 변화가 없다.
명제 3. 담당 선생님의 처방 스타일에 따라 임신 확률이 달라질 수 있다.
결과 : 다니던 난임 병원을 옮겨보자.
case 5)
명제 1. 새 담당 선생님은 공격적인 처방을 내려줬다.
명제 2. 강도 높은 주사와 약을 사용했더니 배에 멍자국이 가득이다.
명제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관 시술에 또 실패했다.
결과 : 그렇게 11번의 시험관 시술을 치르며 꼬박 2년을 보냈다.
그리고 요즘 나는 임신준비기이다. 3년이나 시술을 받아왔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냐고? 팀원과의 1 on 1 시간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분석하기보다는 되는 방향을
더욱 고민하고 동료들과 이야기 나눠야 해'라고 피드백을 했다.
그리고 순간 '어라?' 싶었다.
내 입으로 이야기 한 이야기였는데 되려 내가 뒤통수를 맞은 순간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난임의 원인을 찾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임신의 원인을 만드는 것.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되는 방향으로, 임신의 원인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이 차가운 것 때문에 난임도 아니라는데 뭐 하러 답답하게 수면양말을 신어! 하던 내가 몸이 따뜻하면 더 좋다던데 하며 수면양말을 챙겨 신게 되었다.
내 체중이 난임의 원인이 아니라는데 뭐 하러 운동해 귀찮게!라고 생각했던 내가 몸속 활성 산소가 줄어들면 더 좋다던데 하며 유산소 운동을 늘렸다.
술 때문에 난임도 아니라던데 술 못 먹는 거 너무 싫다! 하던 내가 요즘은 절대 취하지 않게, 그리고 맛있는 논알코올 브랜드를 찾는다.
영양소 부족이 난임의 원인이 아니라는데 뭐 하러 영양제를 늘려! 하던 내가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만한 영양제를 주문했다.
담당 선생님도 아니고 의학기술도 아니고 남편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기쁜 마음으로 임신, 성공의 원인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
어찌 보면 결국 몸을 따뜻하게 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이 행동들은 난임의 이유와 무관하게 누구나 해야 하는 임신 준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난임이라는 것 자체에 매몰 되어 이것마저도 불행,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고 뒤늦게나마 이런 마음을 발견한 게 기쁘다. 그래서 지금 시기를 임신준비기라 처음의 마음을 담아 명명한다.
이다음 시기는 어떤 시기가 오려나. 임신성공기가 되려나? 난임시대의 종말을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