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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글쟁이 5시간전

이번 생은 글렀고, 다음 생엔 꼭 모녀관계로 만나요

-현생 고부관계는 전생에 어떤 관계였을까? 

갑상선 질환으로 진단받고 지난하고 파란만장한 치료과정을 지나 만성질환자로 살게 된 지 어연 10년 차. 

어느 한 분야에서 10년이면 전문가 소릴 듣는다지만, 

질병은 그로 인해 또 다른 질병(합병증)이 생겼다는 소릴 들을 수도 있다. 

일 년에 한 번 검진 후,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늘 그렇듯 일 년 치 약을 처방받고 오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이슈가 있타과 진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나왔다.

어잌후!! 1도 예상 못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교수는 협진의뢰서를 적성하며 지금 전문의 파업 중이라 본원에서

진료받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게 말했다. 

간호사는 우선 집에 돌아가 있으면 전문의 진료를 예약 후, 문자로 보내주겠다고. 

(간호사 쌤들이 이렇게 힘들구나. 어쩌면 환자가 수고스럽게 해야 할 업무까지 대신해 주고 있으니,

외래진료만으로도 엄청 바빠 보이던데, 늘 고마워요)

대신 애써준 간호사 쌤 덕분에 어려울지 모를 진료 예약이 잡혔고

진료 전 검사도 무리 없이 받을 수 있었다(운이 좋았다). 

진료 대기를 위해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환자 대부분이 고령이었다.  

그리고 난, (어쩌면) 평생 먹어야 할 약이 세 알이 추가되었다. 

참담하고 피로했다. 내 시간만 두 세배 빨리 달리고 있는 것 같아서...


새벽에 집에서 나섰는데, 진료를 보고 집으로 향하는 길엔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그때였다.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일 년에 어머니가 나에게 전화하는 일이 다섯 손가락에 꼽을까 말까다. 

그런 어머님이 불현듯 전화하실 땐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할 때'였다.

내가 아이들의 눈물 젖은 목소리를 금세 알아차리는 것처럼

어머니도 내 목소리를 금세 알아차리셨다. 

"병원 갔다 오는 길이냐?"

"..."

"밥은 먹었어?"

"집에서 먹으려고요, 집에 거의 다 왔어요."

"담부턴 굶고 댕기지 말고 근처에서 사 먹어라. 배가 불러야 좋은 생각도 한다."

그런 일이 있고 이틀 뒤, 이른 아침 어머니한테 다시 전화가 왔다. 조금 있음 근처에 도착한다고. 

어잌후!!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당황도 잠시. 

일이 있어 지나는 길에 들렀다고 하셨다. 

평일에 그것도 시가인 강원도에서 경기도를 지나갈 일이 뭔지는 끝까지 말 안 하셨지만, 

어머니는 당신이 바리바리 챙겨 온 것들만 집 밖에서 전달해 주시고 휑하니 떠나셨다. 

점심 드시고 가시라고, 그것도 안되면 차라도 한잔 드시고 가라는 며느리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셨다.


어머니가 건네주고 간 검은 봉투를 열어보니

미나리며 냉이(대체 어디서 냉이를 자꾸 캐오시는 거예요?), 어떤 건 이름도 모르고 처음 본 초록초록 나물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웬 흰 봉투가 들어 있었다. 

뭐지 하고 꺼내 보니...  

어?!!! 나물 속에 웬 흰 봉투가...
엄마...라고 하셨다. ㅠ  ㅠ

행여나 봉투 속 내용물이 빠질까 아껴 아껴 쓰던 동전파스로 입구를 막은 흰 봉투의 정체... 

그 속엔 만 원권으로 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나는 어머님이 이 백만 원을 어떻게 모았을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름 내내 해림이네 복숭아 봉투 씌우고, 미선이네 담뱃잎 조리(?)했을 테고, 정권사님네 버섯 하우스에서 느타리버섯 따고 받은 품삯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 돈을 받을 수 없었다. 

황급히 어머니께 전화해 받을 수 없다고 다시 돌려 드라게 계좌번호를 불러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끝끝내 전화 소리가 왜 이렇게 안들리나며 '밥 잘 먹고 아프지 말고 나중에 보자.' 말씀하시더니 전화를 끊으셨다. 

어머니는 아들 셋 키우는 것도 성가시고 벅찼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와 딸을 또 키우기도 싫고 그렇다고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기도 싫다고.

아무리 서로 잘해준다고 해도 며느리는 며느리고 딸은 딸이라고. 

그러니 너도 나를 엄마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그랬으면서 정작 친정 엄마가 없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결혼식 예단 준비를 하고 두 번의 몸조리를 손수 해주셨다. 어머니를 통해서 나는 엄마가 딸에게 대물림해 주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일테면 '여자는 어디 다닐 때, 꼭 작은 손가방이라도 들고 다녀라(그래야 뭐라도 얻어서 담아 온다고^^)~

'우리 집에 온 사람은 절대 빈 손으로 보내지 마라~' '젖먹이 산모는 사탕이라도 하나 줘라~" 등등 

그날 저녁, 

어머니가 주고 가신 미나리로 부침개를 했다. 

퇴근한 남편에게 오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니,

"우리 엄만데, 꼭 자기 엄마 같네. 나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땐 용돈도 안 주시던 분이~"

퉁퉁거리는 남편의 젓가락질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생은 글렀고 다음 생엔 어머니 딸로 태어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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