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집에서 새집으로 이사한 지 4개월쯤 되었다. 내가 예전에 살던 곳은 일명 안양의 산동네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은 대단지 아파트에 가린 크고 작은 오래된 빌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는데, 입구에 작은 언덕이 있어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남편과 나는 세 번의 이사 끝에 지은 지 20년이 넘은 그 집을 집 값의 50%가 넘는 대출을 받아 구매했다. 남편과 나는 우스갯소리로 '안 방과 화장실 빼고 나머진 은행 거~'라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지만, 좋았다. 얼마나 좋았는지 당시 8개월인 둘째 아이를 아기띠로 안은채 도배와 장판을 직접 할 정도였다.
어릴 땐 아버지의 작업장을 따라 이사를 다녀야 했고, 더 이상 작업장을 나가지 않기 시작한 땐 월세가 가장 저렴한 집을 찾아 전전해야만 했다. 언제든 어디로든 바로 떠나야 하는 우리에겐 짐이 되는 가구나 가전이 없었다. 몇 벌 되지 않는 각자의 옷과 생필품을 담은 박스 두 개, 그게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늘 더 이상 옮기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 '아주심기'처럼 어느 곳이든 정착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뭐라 불러도 상관없이 나는 그 집이 좋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 새언니를 처음 만났다.
아무리 쓸고 닦고 꾸며도 남루하기만 했던 그 집. 그 집으로 오빤 결혼할 사이라며 새언니를 데리고 왔었다. 내가 본 새언니의 첫인상은 만개한 벚꽃나무처럼 향기롭고 화사했다. 나는 새언니가 (순수문학) 작가라는 사실에 신기해했고, 새언니는 내가 작가지망생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당시 난 유치원 교사가 본업이었다).
별을 탐구하던 평범한 직장인 오빠와 별을 보고 꿈을 꾸던 작가인 새언니의 만남은 새언니 지인(소설가_훗날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읽었다)이 주선한 소개팅이었다. 오빠는 어머니가 없었고, 새언니는 아버지가 없었다. 처음 만난 장소는 교보문고 본점이었고, 오빠와 새언니는 10년 동안 8번 헤어지고 9번 재회한 후 3년 뒤 결혼했다(엄청나게 파란만장하다~ ^ ^)
예전에 나는 오빠가 아닌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첫 생리를 할 때, 속옷을 사야 할 때, 처음 구두를 신었을 때, 눈썹 화장을 못해 쩔쩔맸을 때, 결혼 준비를 할 때, 첫 아이를 낳을 때, 그 아이에게 젖을 물렸을 때, 아이가 아팠을 때, 내가 아플 때... 살면서 때때마다 나는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나왔다. 남자인 아버지는 딸을 공감하지 못했고, 오빤 여동생의 어려움을 몰랐다.
낯설어하는 나를 향해 새언니는 (자기도 어색했을 텐데) 엄청난 구애를 하기 시작했다. 첫 만남은 역시 교보문고였다. 새언니는 교보문고 입구에서 잔다르크처럼 외쳤다.
"아가씨, 읽고 싶은 책 전부 고르세요!"
맙소사! 이토록 매력적인 여성이라니~ ^ ^
두 번째 만남은 더 대단했다. 신혼집 소개를 끝낸 새언니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서고로 데려갔다. 웬만한 중고서점을 방불케 했던 새언니의 서고. 새언니는 신혼살림 중 가장 먼저 자신의 책들을 들여왔다. 1톤 트럭에 다른 짐 없이 오로지 책만 30박스 싣고 와야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고 했다.
"아가씨, 제 서고를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이 없었어요. 아가씨가 처음이에요."
새언니는 자신의 서고에서 작법서와 이론서등을 쏙쏙 뽑아 내게 건네주었다. 최근 재밌게 읽었다는 책들도 아낌없이 꺼내 주었다. 급기야 신춘문예 당선전까지 사용했다던 노트북까지 내어 주며 좋은 기운이 담겨 있으니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쓰라고 했다. 그렇게 나에게도 첫 노트북이 생겼다. 새 걸 사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런 거 상관없이 나는 좋았다. 나를 향한 새언니의 진~한 마음이 묵직하게 느껴져서.
새언니가 지오를 낳을 때 일이다. 축하의 꽃다발을 들고 병원에 방문했는데 퉁퉁 부은 얼굴로 새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울었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해 주변사람을 쉽게 적신다. 새언니가 우니 옆에 계신 사돈어른도 우셨다. 울면서 하시는 말씀이.
"애가 글쎄... 분만실에서 나오자마자 막 울더라고요."
초산에 19시간 진통은 정말 힘든 일이니 나는 그럴 만도 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 낳는 일이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자기 아가씨는 친정 엄마도 없이 혼자서 아이 둘을 낳았다며... 불쌍하다고 안쓰럽다고 지 아픈 줄도 모르고 막 울었어요. 애가 글쎄..."
맙소사... 정말 새언니 ㅠ ㅠ 나는 한참 동안 어정쩡한 자세로 새언니 품에 안겨 있어야 했다 진심을 담아 온몸으로 우는 새언니의 들썩임을 느끼며. 나는 '울지 마'라는 말이 더 많은 울음을 만들어내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새언니, 그렇게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근데 나 안 힘들었어요. 새언니처럼 나를 온 마음으로 위해준 내 가족들이 있어서. 언제나 나를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내 작품을 읽고 정성 들여 합평문을 써주는 새언니, 나는 엄청난 행운아다.
어릴 때부터 잘 울던 나는 커서도 툭하면 울었다. 무서워서, 아파서, 억울해서, 서러워서, 화가 나서, 짜증 나서, 누군가 끝도 없이 그리워서... 우는 나에게 사람들은 말했다. '울지 좀 마!' 그러면 나는 더 크게 많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른다. 울지 말라는 그 말은 마치 주문 같아서 더 많은 눈물을 쏟게 만든다는 것을.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울어도 괜찮다는 말을 해 준 사람이 새언니였다. 눈물은 마음에 낀 먼지를 씻어내는 물과도 같으니 참지 않고 울어도 괜찮다고. 비록 늦었지만 나는 오빠의 결혼과 동시에 나에게도 (새) 언니가 생겼고 이후 내가 그토록 바랐던 공감과 배려를 새언니로부터 넘치게 받을 수 있었다. 새언니가 내게 준 많은 것들엔 대가와 조건이 없었다. 언젠가 새언니에게 물었다. 내게, 내 가족들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느냐고. 새언니의 대답은 짧았지만 긴 여운으로 남았다. '내 가족이니까.'
한때 가족이 상처와 아픔의 원인이라 생각했었는데, 결국 치유와 희망 역시 가족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언니가 아녔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저항 없이 나를 처음으로 공감하고 배려해 주는 새언니가 나는 있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엄청나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