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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글쟁이 Dec 18. 2024

시어머니의 감자옹심이

시어머니에게 음식을 배워본 적이 없다. 강원도인 시가는 설날엔 만둣국에 넣을 만두를 추석엔 버선처럼 빚어 손가락 자국을 낸 송편을 집에서 빚고 종잇장처럼 얇은 메밀 전을 모두 집에서 만든다. 결혼 24년 차인 나는 여전히 만두도 송편도 메밀 전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밉기 어렵겠지만, 시가는 여전히 제사를 지내고 시부모님 생신엔 매해 집에서 상을 차려 친인척 및 동네분들을 초대해 대접한다.

 어머니는 가풍이나 토속에 따라 음식을 배우라는 말도 가르치려는 시도도 하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명절엔 미리 송편이며 만두를 미리 빚어 놓으시고, 제사땐 환상의 짝꿍인 작은 어머니들과 음식을 만드신다. 어머니도 작은 어머니도 며느리가 있지만 한 번도 틈을 내어주신 적이 없다. 겉으론 늘 '네들이 개뿔이나 뭐 아냐?'라고 하시지만, 며느리들 고생할까 봐 헤아려주심을 안다. 어머니도 작은어머니도 딸은 없지만, 딸 가진 엄마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신다. 당신들이 딸이었으니까.


그런 내가 유일하게 눈썰미로 배운 요리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감자 옹심이다.

시부모님 결혼식 사진_열여덟 어린 신부인 어머니의 얼굴에 남편 얼굴이 있다

"나 가진 거 이 리어카 하나밖에 없어. 나 따라 리어카 미는 거라도 괜찮으면 결혼하자!"


양갈래 머리를 한 열여덟 시어머니에게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시아버지의 박력 있는 프러포즈였다. 어머니는 그 길로 그 리어카를 밀고 아버님을 따라 집에 왔다고 했다. 막상 와서 보니 홀시아버지에 역시 홀아주버님에 그 밑으로 어린 시동생들이, 줄줄이 남자만 있었다고 했다.


"그때 내뺐어했는데..."


어머니가 그때 '내빼지' 않아 남편이 세상에 태어났고, 어머니 외모와 성품을 빼닮은 남편과 내가 결혼까지 했다. ^ ^

가진 것이 정말 없어 결혼 예복과 족두리를 빌려 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다. 결혼과 동시에 양갈래 머리를 풀고 쪽을 지고 가마솥에 불 때서 밥을 해야 했다고, 매운 연기 때문인지 시집살이 때문인지 매일매일 눈물로 다섯 남자들 먹일 밥을 했다고 한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시아버지는 리어카에 남의 집 소들을 먹일 풀을 베어 나르는 일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기르기 시작했고, 그 시작이 지금은 어엿한 축산업자로 자리 잡았다.

눈썰미로 배운 감자옹심이 만들기!

"어릴 때 엄청 굶었는데"

"굶긴 뭘 굶어! 나 니들 굶긴 적 한 번도 없어, 산으로 들로 뛰어 댕기며 먹여놨더니 쉰소리하고 자빠졌네!"


다큐멘터리를 보며 생각 없이(?) 내뱉은 남편의 왜곡된 기억을 어머니는 한 방에 날리듯 말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첫째는 젖이 돌지 않아 배곯아 우는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엎드려 쪽잠을 자야 했고 셋째 때는 젖이 모자라 형님(시큰 어머니)의 젖을 빌어 먹여야 했지만, 둘째(남편) 때는 젖이 남아돌았다고 한다. 먹고 자서인지 성격도 둘째가 제일 좋다고. 그랬다, 가난했지만 천성이 부지런한 부모님 덕분에 남편은 한 끼도 굶은 적이 없었다.

'밥은 먹었냐?'가 안부인사였던 그 시절, 배고픔을 구원했던 식재료가 감자였다고 한다. 그중 감자 옹심이를 거의 끼니마다 먹었다고. 과거 굶주린 유럽을 구원한 채소가 감자라고 하던데, 어머니의 가난을 구원해 줬던 재료도 감자였나 보다. 하얗게 핀 감자꽃 보고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을 보는 배가 불렀다고 한다.

"옹심이 안 먹어봤냐? 허이구~ 강원도에 시집왔으면 감자옹심이는 먹어 봐야지!"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감자 옹심이를 보고 남편에게 '저건 무슨 맛이야?' 묻는 내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날 점심에 감자 옹심이를 끓여주셨다. 감자옹심이 할 때 반드시 강판에 갈아야 감자의 육질이 씹혀 입안이 뿌듯하다고(어? 그 옛날에도 강판이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담에 물어봐야겠다) 한다.

예상했겠지만 육수는 맹물에 대기업의 힘을 한 수저 듬뿍 넣고 팔팔 끓여 옹심이를 동그랗게 빚어 넣어 끓이다 옹심이가 동동 뜨면 완성된다. 감자를 갈아서 체에 밭쳐 감자 건더기와 물을 분리하고, 분리된 물에 가라앉은 감자전분을 섞어 함께 반죽하는 과정 외에는 어려울 것도 없었다.

따뜻하고 걸쭉한 국물에 감자 맛이 녹진하게 느껴진 감자 옹심이, 남편도 아이들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 비워냈다. 그런 우릴 바라보는 어머니 얼굴에 살아온 날들의 '소확행'이 느껴졌다.

어머니에게는 가난으로 기억된 감자옹심이는 남편에겐 '엄마 손맛'으로, 아이들에겐 '할머니 별미'로 나에겐 '시어머니의 옹심이'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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