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 연애를 하겠다는 다짐을 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평일엔 회사, 주말엔 소개팅. 마치 ‘연애 시간표’라도 있던 것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던 기억이 납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저, 꽤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만나던 어느 날, 한 분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이름은 ‘O영주’. 처음 연락을 주고받을 때, 저는 평소 습관대로 그녀를 자연스럽게 ‘영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군가를 처음 대할 때 ‘OO 씨’보다는 ‘OO 님’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쓰는 편인데, 조금 더 존중이 느껴지고 상대방을 살짝 높이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특히 소개팅처럼 첫 인상이 중요한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랬고요.
그런데 이 호칭을 계속 쓰다 보니, 스스로도 예상 못 한 방향으로 상상이 흘러갔습니다.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영주님,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영주님,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어요” 같은 말을 쓰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나... 소작농 된 거 아냐?” 조선시대 농민과 영주의 이미지가 자꾸만 머릿속에 겹쳐지더니, 급기야 ‘공양미를 바치러 가는 농민’ 역할까지 스스로 몰입하게 되었죠.
'영주님... 올해의 공양미입니다...!
내년에도 땅을 빌려주십시오..!'
물론 상대방은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겠지만, 너무 몰입해서인지 그 호칭이 점점 웃기게 들리기 시작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OO 님’이라는 호칭을 좋아합니다. 어쩌다 유쾌한 착각이 생기는 순간이 있더라도, 말 속에 담긴 존중과 따뜻함은 분명히 상대방에게 전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은 참 사소했지만, 동시에 큰 깨달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말투 하나, 단어 하나가 어떤 분위기를 만드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존중은 결코 어렵거나 거창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기억이었습니다.
P.S. 전국에 계신 '영주'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분께 사과드립니다..
"존중은 작은 말투에서 시작된다.
'님' 하나가 관계를 바꾼다"
- 김미경 '언니의 독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