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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잔 받은 전역자의 마지막 건배사

by 루키트

“좋으면 추억, 나쁘면 경험.”


예전부터 자주 떠올리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든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결국 마음에 남는 건 그 순간의 감정이나 기억이더라고요. 6년 전, 전역을 앞두고 간부님들과 마지막 회식을 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고, 사회에서도 건강하자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따뜻한 시간을 보냈죠.


제가 복무했던 부대에는 오랜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전역을 앞둔 간부에게 동료들이 돌아가며 한 잔씩 술을 따르고, 감사와 응원의 말을 전하는 시간이 있었죠. 그날 저는 모두에게 26잔쯤 받았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인생 처음으로, 정중하고 조용하게(?) 만취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도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얼떨결에 잔을 들고 입을 열었습니다. “좋으면 추억, 나쁘면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군 생활 동안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 간부님께서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엥? 소대장님, 우리랑 별로였어요?” 그제야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신이 들었고, 급히 정정했습니다. “앗, 취해서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저는 정말 많은 추억을 만들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모두 웃으며 받아주셔서, 분위기는 오히려 더 따뜻해졌습니다.


그날의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나옵니다. 물론 힘든 날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모든 순간들이 결국 추억으로 남아 마음 한편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 시간이 언젠가 “좋은 경험이었다”, 혹은 “아름다운 추억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험은 때때로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기에.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건 사람, 마음, 그리고 그 마음 안에 머무는 어떤 따뜻한 장면들이기에.


"좋든 나쁘든,

모든 경험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수집품이다"

- 아이작 마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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