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깜짝 놀란 어머니의 얼굴입니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미안함과 웃음이 동시에 밀려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고, 태풍이 예보된 어느 오후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예상을 뛰어넘는 날씨에 대비해 학생들을 조기 하교시켰죠. “얘들아, 태풍이 점점 심해질 거야. 바로 집으로 가야 해, 알겠지?” 선생님의 당부에 아이들은 우산을 챙겨 집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구와 눈을 맞춘 뒤, 조심스레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곳은 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 없는, 비에 흠뻑 젖은 운동장. 평소에는 차례를 기다려야 겨우 한 번 올라갈 수 있던 정글짐, 철봉, 널뛰기 같은 기구들이 모두 비어 있었고, 그 광경이 우리 둘에겐 마치 꿈의 놀이터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정글짐을 타고, 빗물이 고인 땅을 뛰어다니며 마음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간이 흐른 줄도 모른 채,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아이처럼요. 결국 옷은 흠뻑 젖고,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때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습니다. “무슨 일이야! 어디서 이렇게 젖었어? 우산 부러졌어? 무슨 일 난 거 아니지?!” 순간 당황하긴 했지만, 저는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친구랑 운동장에서 놀다 왔어요!” 걱정이 가득한 얼굴 앞에서 그렇게 말하던 저는, 참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얼마나 어이가 없고 걱정되셨을지를요. 놀란 마음은 곧 걱정으로 바뀌었고, 어머니는 따뜻한 물로 씻긴 뒤 바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저는 결국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몸은 많이 힘들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유쾌하고 따뜻하게 떠오릅니다. 그날 어머니의 놀람은 저에 대한 사랑과 걱정이 고스란히 담긴 반응이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아이의 무모한 즐거움을 조용히 감싸 안아주신 어머니. 그땐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내보면 마음이 참 따뜻해집니다.
이제는 어른이 된 제가, 누군가의 우산이 될 수 있을까요? 아무 조건 없이 걱정해주고, 젖은 몸을 따뜻한 물과 이불로 감싸줄 수 있는 사람. 비가 내리는 날, 다시금 다짐해봅니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가장 단순한 순간이,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된다"
- 시드니 J. 해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