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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Nov 14. 2023

종이책을 읽는 손 맛

책이 늘어나는 속도가 감당되지 않아 이북 리더기를 샀다. 지하철 안이나 여행지에서 보려고 책을 한두 권씩 들고 다녔더니, 안 그래도 작은 키가 더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새로 산 이북 리더기는 패딩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사이즈도 작고 무게도 가벼워 외출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서관 회원가입을 하거나, 리더기를 사면서 받은 멤버십 쿠폰을 사용하면 보고 싶은 책을 무료로 볼 수 있으니, 책 사는 비용도 아낄 수 있다. 설탕 액정이라 조심하라는 제품 리뷰를 보고는 딱 맞는 도톰한 파우치를 사기 위해 소품샵이나 서점을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그리고 그 파우치에 넣어 어딜 가든 함께 했다.


하지만 종이책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어디서든 시간이 허락하면 동네 책방이나 큰 서점을 어슬렁거렸고, 그러다 보면 꼭 책 한두 권을 품에 안고 나오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을 메모해 두고 이북을 다운로드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여해도 되지만, 이상하게 지금이 아니면 저 책을 못 볼 것 같은 아슬한 마음이 들었다. 돌아 나오는 내 뒤통수에서 책이 나를 불렀다. 그럼 책장에 꽂아두고 꼭 시간 내어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그 책을 사곤 했다. 그랬더니 이젠 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전에 그 책을 봤는데, 어디 뒀더라?'라며 책장을 여기저기 뒤적거리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침대 위에서 이북을 폈다가 리더기 책장에 그 책이 있는 것을 보고 낮동안 헤맸던 내 모습이 생각나 탄식이 흘러나오곤 했다. 내가 본 그 책이 종이책인지 이북인지 헷갈렸다.


종이책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종이를 한 장 들어 옆으로 넘기고 손바닥으로 쓸듯이 책을 펼치면, 햇빛에 잘 말린 홑이불을 걷어 개는 기분이 잠시 든다. 소설 속 인물이 앞 장에서 누구를 만났었는지 헷갈리면, 더듬어 가며 몇 장을 촤르르 넘기다 탐정처럼 그 순간을 귀신같이 잡아낸다. 쉴 틈 없이 호흡이 빠른 에밀졸라의 책을 읽을 때는 나 또한 그 속도를 놓치기 전에 찾으려고 손가락 끝에 침을 조금 묻혀 종이를 넘긴다. 그럼 입술의 침을 훔치는 손가락과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어우러져 두근거리는 긴장은 더 고조된다. 그러다 책 절반 이상을 읽어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두꺼워지면, 아직 나오지 않은 클라이맥스나 반전을 기대해본다. 특히 마음에 드는 책은 점점 얇아지는 오른쪽 두께가 못내 아쉬워서 부러 천천히 읽으려 노력한다. 괜히 내일 읽으려고 더 읽고 싶은 마음을 외면하며 책갈피를 끼우곤 한다. 그건 흡사 맛있는 감자 뇨끼를 먹다가 얼마 남지 않은 양을 보고 흠칫 놀라며 샐러드나 다른 요리들을 조금 먹으며 속도를 늦춰본다거나, 남은 뇨끼 조각수를 세어보며 숟가락을 놀리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다 점점 남은 장수가 줄어들어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게 되면, 결국 완독 해냈다는 뿌듯함과 이제 소설 속 주인공들은 나와 다른 시간과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가겠구나 하는 아련한 그리움이 불쑥 올라와 마지막 종이를 두 번 세 번 만지작거리며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한다. 그리고 에필로그를 보며 작가와의 마지막 대담을 시작한다.  


책을 읽다 보면 기억하고 싶은 문구에 밑줄을 긋거나, 인덱스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읽다만 곳을 표시하기 위해 책갈피를 꽂기도 하지만 급하면 한쪽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조금 접어둔다. 나중에 책장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 휘리릭 넘기다 그런 나의 흔적을 발견하면, 그때는 왜 이 부분이 좋았을까 상상하며 어린 시절 일기를 발견한 듯 내가 낯설면서 흥미롭다.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길을 잃었다가 과자 빈봉지를 발견한 것처럼 눈에 걸리적거리면서도 무척이나 반갑다. 시간이 흘러 나는 변했고, 이제는 다른 문장에 마음이 설렌다. 그럼 다른 색 형광펜을 꺼내 새 밑줄을 긋는다. 여기저기 버려진 과자 봉지처럼 흔적을 남긴다.


이북리더기가 아무리 가볍고 편리하고 경제적이라 하더라도, 다시 종이책을 모으고 있다. 정말 좋은 친구는 전화나 메신저보다 직접 만나는 게 반가운 것처럼. 손을 만지고 어깨를 툭툭치고 팔짱을 끼는 친밀한 행동을 하고 싶은 것처럼. 이북을 보면 볼수록 종이책에 대한 갈증을 더 키운다.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의 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손 끝에 전해지는 책의 두께, 표지의 멘질멘질함, 펼쳤을 때 종이의 사각거림, 남은 분량만큼 커지는 아쉬움, 다 읽고 난 후 여기저기 남겨진 나의 흔적과 펼쳤던 자국. 아무래도 책장을 비우고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목표는 또 한해 미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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