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졸라의 <목로주점>을 읽고
에밀졸라는 천재였다! 500페이지가 넘는 <돈>을 홀린 듯이 읽어버린 후, 이어 <목로주점>을 읽었다. 좀 더 얇긴 해도 두 권으로 되어 그 분량이 부담스러웠는데, 주말 동안 푹 빠져 순식간에 읽어버리고야 말았다. 덕분에 주말 내내 두통과 울렁거림에 곤혹스러웠지만, 이 또한 명작을 만날 때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이니,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의 문장은 길지만 매력적이었고, 실제로 겪은 것일까 싶을 정도로 생생했고,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사연은 가슴을 파고들었다. 번역만 되어있다면 '루공마카르 총서' 20권을 모두 읽고 싶은 심정이었다.
<돈>에서는 2500만 프랑의 자본금을 보유한 금융회사를 차리겠다며 사카르가 큰소리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2억 프랑을 금고에 소유할 정도로 회사가 커지는 과정을 봐왔었다. 그에 반해 <목로주점>에서 주인공 제르베즈는 굶주림에 단 10수 (0.5프랑)를 빌리기 위해 로리외부부를 찾아간다. 소설에 나오는 돈의 차이만큼 그들의 삶은 많이 달랐다. 가난할수록 불결했고, 언어와 행동은 폭력적이었고, 인간의 존엄은 사라졌다.
남성위주인 그 시대를 고려했을 때,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 만으로도 이 책은 매력적이었다. 제르베즈가 세탁소를 열어 성공 가도를 달릴 때, 나는 그녀가 꿈꾸는 데로 그녀의 침대에서 죽을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빈대 같은 전 남자 랑티에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고, 술에 빠져사는 남편 쿠포를 다시 정신 차리게 하거나 쫓아내거나, 좀 더 현대의 내가 꿈꾸는 사람이길, 더 자유롭고 멋지고 강한 여성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래도 19세기 파리에서는 무리였나 보다. 그녀는 남편을 거역하거나 버리지 못했고, 함께 몰락해 갔다. 가정폭력에 아내와 딸이 죽어가도 비자르 영감은 술을 마셨고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여자의 뺨을 때리거나 엉덩이를 꼬집는 일은 늘 있는 일이었고, 아동 노동과 학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저 시대에 저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소설책 보는 내내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땐 그게 상식이었을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의 삶과 생각들도 백 년 후 미래에서 보기엔 비상식 투성이겠지? 그 시대를 흡사 바로 옆에서 보고 있는 듯한 에밀졸라의 문장들 덕분에 타임머신을 타고 그곳을 직접 다녀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책은 고전이었다. 상식은 조금 달랐을지라도, 주인공과 등장인물의 인생을 통해 현재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니 말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도덕적 메시지를 발견한다면, 그건 '술독에 빠지지 말고 노동의 신성함을 알고 과시하지 말고 절약하며 살자.' 정도가 될 것 같다. 쿠포가 달콤한 무기력함과 무위도식의 즐거움을 알아낸 장면에서는 속으로 조금 뜨끔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제르베즈가 음주에 빠져 나태해진 것은 결국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때문이라는 점, (책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에밀졸라는 유전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자연주의자 작가이다) 그래서 그녀의 몰락은 어느 정도 정해진 운명이라는 점이 이 책의 후반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제르베즈를 응원하는 독자로써 조금 불쾌했었다. 게다가 한때 (지금도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다 시피하여 한, 그리하여 인종차별 문제를 만들고 있는 우생학의 초기 개념이 언뜻 보이는 것 같아 씁쓸함이 불쑥 올라오기도 했다.
한동안 에밀졸라의 매력을 거절하지 않고 푹 빠져지낼 예정이다. 순식간에 흐르는 문장의 힘을 느껴보고 싶거나,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모습이 궁금한 사람, 장편 혹은 고전소설을 읽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책의 두께는 아무것도 아니다. 흡입력 있는 에밀졸라의 문장에 어느 순간 19세기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서 화려하거나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파리지엥의 모습을 목격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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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오. 아름다운 부인... 그대도 언젠가는 죽는 걸 다행으로 여기게 될 거요... 아무렴, 난 죽음이 데러 간다면 오히려 고맙다고 할 여인네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거든." (중략) "죽는다는 건 말이지... 내 말을 명심하시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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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온몸의 근육을 달콤한 무기력함에 내맡긴 채 무위도식하는 즐거움을 알아갔다. (중략) 땀 흘리는 동료들을 향해 다리를 길게 뻗으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가 고작 이런 거냐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면서 일에 대한 원한을 해소했다. 물론 그도 다시 일을 할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 시기는 가능한 한 늦을수록 좋을 터였다. 오! 너무 열성적으로 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도한 쓰라린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었다. 게다가 조금 더 빈둥거리며 지내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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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엔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제르베즈 부인."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의 순수한 우정을 이해하시겠지요?" 그는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잿빛 머리카락 한 가닥에 입을 맞추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의 소중한 친구 제르베즈만이 그에게 남은 전부였기 때문이다. 지극히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한 구제는 뒷걸음질로 물러나다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참았던 오열이 터져 나오면서 목이 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