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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Jan 08. 2024

눈 내린 다음 날

부츠를 신고 덜 녹은 눈을 뽀드득 밟아요

어제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이런 날은 눈을 밟아도 미끄러지지 않고, 물이 스며들지 않을 부츠를 신고 나가야 한다. 얇은 내복을 입고 흙물이 튀어도 괜찮을 무릎이 조금 나온 블랙진을 덧입었다. 편한 스웻셔츠에 입을 반쯤 가릴 수 있는 머플러를 두 바퀴 두르고 무릎까지 오는 긴 패딩을 꺼내 입었다. 눈길에 미끄러울 수 있으니 편한 장갑도 필수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운 좋게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밭을 발견했다. 고양이가 먹잇감을 향해 다가가듯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잘 찍힌 내 발자국을 서너 걸음에 한 번씩 돌아보며 하얀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듯 발자국 그림을 남긴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잘 남겨진 것을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이 눈밭을 좀 더 길게 즐기고 싶어서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용모양으로 발자국 그림을 찍는다.


눈밭을 지나서 가던 길을 더 걸어간다. 어젯밤과 오늘 새벽 부지런한 사람들이 뿌려놓은 염화칼슘덕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은 벌써 촉촉이 젖은 보도블록이 드러났다. 좁게 나있는 녹은 길 옆으로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눌려 약간씩 투명해지는, 맑은 하늘의 태양빛을 머금다가 조금씩 반사하는 얼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얼음은 가끔 고드름처럼 투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흙이나 먼지 얼룩과 섞여 은색이나 회색, 검은색, 갈색과 같은 색깔들을 조금씩 품고 있다. 사람들이 덜 밟아서 아직 얼음이 되지 않은 부분을 걸으면 뽀득뽀득 소리가 경쾌하게 난다. 폭신한 눈이 있어 밟아도 미끄러지지 않을 걸 아는 나는 좀 더 과감하게 쌓인 눈 쪽으로 걸어간다. 뽀득뽀득 소리에 충분히 즐거웠으면 이제는 쌓인 눈을 발로 괜히 차 본다. 공을 차듯 힘을 줘보지만, 눈은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져 바람으로 날린다. 5살 아이가 된 듯 허탈한 발차기를 한두 번 더 해본다. 


눈을 밟고 차며 장난을 치니 아침에 본 글이 생각났다. 편성준 선생님이 SNS에 글을 올리셨는데, '눈이 오면 왜 따뜻할까요'라는 내용으로 당신이 있으니 따뜻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였다. '선생님, 물이 기화가 되면 주변의 열을 빼앗아 온도가 내려가요. 몸에 묻은 물이 증발하면서 시원해지는 것이 그런 원리지요. 눈은 반대예요. 주변에 열을 내주면서 수증기가 얼음이 된답니다. 그래서 눈이 오면 따뜻하게 느끼는 건 과학적으로 사실이랍니다.'라고 댓글을 쓰려다 참았다. 윤혜자 선생님과 눈길을 같이 걸으며 발자국을 만든 뒷모습 사진이 너무 낭만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진에 이은 그 시는 두 분의 아름다운 러브레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곳에 이과가 좀 웃자고 이상한 댓글 남겼다가 눈 온 다음날의 감성을 다 깰까 봐 꾹 참았다.


이제 오르막길이다. 오르막은 눈이 다 녹은 좁은 길로 조심히 오른다. 군데군데 덜 녹은 눈은 얼음이 되어 '어디 한번 나를 밟아보시지'라고 눈을 반짝이며 나의 실수를 기다린다. 쉬이 당할 내가 아니지. 녹은 부위가 넓은 곳만 골라 발을 딛는다. 그러다 맞은편에 누군가 내려오면, 좁은 등산로에서 마주친 것처럼 옆으로 조금 비켜서 그 좁은 길을 먼저 온 사람이 잘 지나갈 수 있도록 기다린다. 대여섯 걸음 총총 내려오면, 나는 이어 그 길을 저벅저벅 올라간다. 


엄마 집 앞에 도착하니 허벅지까지 오는 눈사람, 주먹만 한 고양이 눈사람, 무릎까지 오는 강아지 모양 눈사람이 띄엄띄엄 한 줄로 서있다. 아마도 이 동네 꼬맹이들이 엄마나 아빠 도움을 받아서 아침에 만든 것이리라. 아까 눈을 차서 공중으로 날려버린 것처럼 발 끝으로 톡톡 건들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눈축구를 하고 싶은 내 동심만큼이나 눈사람을 만들었을 아이의 노고도 소중하니 다리가 닿지 않게 멀찌감치 물러섰다. 그러고 보니 눈사람은 앙증맞은 체크무늬 머플러를 하고 있었고, 나뭇가지로 만든 팔에는 연분홍색 털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플라스틱 병뚜껑이 모자처럼 얹어져 있었고, 눈사람의 오른쪽 눈은 하트모양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온 나는 이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이제 집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입구에서 부츠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복도와 엘리베이터는 아직 눈의 기운이 남아 있어 썰렁했지만, 엄마 집 현관문을 여니 훅 하고 따뜻한 공기가 순식간에 내 볼과 코와 허벅지에 내려앉았다. 집은 포근하고 따뜻해서, 내가 가져온 찬기운이 금세 도망가버렸다. 그렇게 몸을 녹이고 나면 다시 추운 밖으로 나갈 기운을 얻는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 따뜻한 곳에서 나가기 싫다. 그래서 같이 저녁밥을 먹고도 나는 금방 일어서지 않고, 과일과 뻥튀기와 하리보젤리 같은 주전부리들을 더 먹었고, 주말 예능을 시시덕거리며 같이 보면서 밤이 깊어지는 것을 억지로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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