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알고 보니 자유를 얻은 것이었어요 (7편)
2022년 11월 초 글로벌 정리해고 통보가 있기 일주일 전,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과 복통에 시달렸다. 뭘 먹으면 게워냈고 고열이 났고 동네 병원에 가도 코로나는 아닌데 원인을 잘 모르겠다며 일단 쉬어보라고 했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아프고 나니 열은 좀 내려서 살만한데, 뭘 해야 할지를 몰랐다. 좀 더 쉬라고 하는데 뭐가 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기운 없이 앉아있었다. ‘어떻게 쉬어?’라고 남자친구에게 물어보니 ‘멍때려봐’라고 답이 왔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서 멍때려보려고 하니, 미뤄둔 회사 일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정말 쉬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이 심정을 SNS에 올렸더니, 회사 동료 J님이 계획을 세워주셨다. “쉬는 건 휴대폰도 텔레비전도 없이 지내는 거예요. 가볍게 걸어보기도 하고, 목욕탕도 가보고 그럼 좋겠네요.” 그래서 그날 나는 가벼운 산책을 하고 1인 세신 샵을 찾아가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때를 밀었다.
나는 원래가 부지런하기보다는 게으른 쪽에 가까운 사람인데, 이 회사에서는 부지런하다 못해 휴식하는 법을 잊어버릴 만큼 일했다. 친구 만나는 시간을 줄였고, 길만 건너면 되는 엄마 집에 가는 횟수를 줄였다. 그래도 부족하자 잠을 줄였고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서 일과 회사에 매달린 시간이 억울하진 않지만, 내가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속상했다.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퇴사를 결심하면서 가장 먼저 작정한 것이 ‘잘 쉬어보자’는 것이었다. 무작정 쉬어야지 하면 제대로 못 쉴 거니, 몇 가지 해야 할 쉼 리스트를 작성해보았다. 시계를 보지 않고 밤늦도록 넷플릭스로 영화 보기, 알람을 맞추지 않고 원 없이 푹 자기, 나를 괴롭혔던 캘린더 앱을 삭제하고 ‘심심해 죽겠어’를 시연해보기, 한가하게 동네 산책하고 카페에서 시간 허투루 써보기 등등이 있었다. 그리 특별한 것도 없었지만, 바쁘게 살아온 만큼 나에게 권태로움을 선물하고 싶어서, 하얀 빈 종이에 쉼 리스트를 쓰면서 혼자 좋다고 키득거렸다.
그런데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한가하게 빈둥거리며 쉬기가 쉽지 않다. 넷플릭스를 새벽 두 시까지 보고 나니,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죄책감이 들어 다음 편 보기를 중단했다. 회사 다닐 때도 좋아하던 드라마 본다고 토끼 눈이 되어 출근한 적이 있었는데, 쉬게 되니 오히려 출근 때보다 더 규칙적으로 절제하게 되어, 하루 딱 한편만 보게 되었다. 그마저도 보던 드라마 시리즈가 끝나자 멤버십을 끊어버렸다. 대한민국 국민은 다 본 거 같은 ‘더글로리’도 안 봤으니 말 다했지. 운동은 해야 하니 요가를 등록하고 매일 아침 러닝이나 등산 계획을 추가했다. ‘이럴 때 엄마랑 같이 더 시간을 보내야지, 엄마도 운동하고 다이어트하면 좋겠지’ 싶은 마음에 오전 운동 시간에 엄마를 꼬여내 뒷산에 갔다. 등산 좋지~ 운동 좋지! 라던 엄마는 ‘등산가자’는 내 메시지를 겨우 운동 시작 이틀째 만에 ‘거머리!’라고 답하고는 한동안 내 메시지를 일명 읽씹 (읽고 무시하는 것)하셨다. 빈둥거리는 백수가 될 거야! 라는 결심은 어디를 가고 나는 공식적인 퇴사 다음 날 은평구립도서관 회원증을 만들고, 북클럽 모임을 가고,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어떤 주간은 매일 두어팀씩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이 누렇게 뜨고 다크서클은 아침부터 내려와 있었다. 팔자주름은 더 깊게 파여, 외출하면 그날은 내내 크게 웃는 얼굴이어야 할 지경이었다. 참고로 팔자주름을 숨기는 나만의 비법은 많이 웃는 것이다. 그러면 이 주름이 나이 들어 쳐져 생긴 주름인지 웃어서 생긴 주름인지 모르게 하는 것인데,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물어보는 즉시 내 팔자주름이 더 강렬히 보일 테니 쉽사리 확인하지는 못하겠다.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듯 어느 순간 나의 쉼 계획과 사람 만나는 일정 들이 중복해서 잡히기 시작했다. 그나마 내 개인 계획이 겹치면 뭐라도 하나 포기하면 되는데, 어쩌다 사람들 약속이 겹치면 큰일이다. 게다가 이제는 내 머리로 기억할 수 있는 한계를 슬슬 넘어가고 있다는 확신도 들기 시작했다. ‘로란님 오늘 제가 급하게 일이 생겨서 같이 점심을 못 먹을 것 같아요. 우리 다시 일정 잡아요. 미안해요.’라는 메시지를 받고서야 내가 중복으로 약속을 잡은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작년 연말에 사두었던 귀여운 고양이 일러스트 달력에 약속들을 적어두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실하게 일정 관리가 잘 안 되고 있었다. 아 어쩌지 어쩌지를 연발하다 결국 나는 삭제했던 캘린더 앱을 다시 깔고야 말았다. 테트리스 같았던 캘린더를 싹 지우고 한가롭게 지낼 거라고, 심심하게 지낼 거라고, 호기롭게 큰소리쳤지만, 결국엔 그때처럼 쉬는 일정과 노는 일정 들을 차곡차곡 캘린더에 기록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내 핸드폰에는 테트리스처럼 생긴 캘린더 앱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