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떠나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과 지내면서 내가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어렵다. 주변이 동일하다 보니 변화의 이유가 전혀 없다고 인지할 수 있는데, 머릿속으로만 억지로 변해야 해 변해야 해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목표한 만큼 변화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고 역시 난 안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변화하려는 의지를 꺾어버리는 것은 나의 의지박약이 아니라 어쩌면 평소와 똑같은 내 주변 환경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주변을 조금 바꿔 환기함으로써 변한 상황에 맞게 나를 바꿔보려고 했다. 그래서 공연의 1막과 2막 사이의 인터벌 시간처럼 나만의 안식기간을 두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휴식도 취하고 내 몸도 정비하고 인생 2막을 위한 준비를 잘해보려고 한다. 인터벌 시간에는 공연장을 나가 홀에 있는 카페로 가서 상큼한 과일주스로 리프레시하거나, 홀에 삼삼오오 모여 공연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화장실을 들러 볼일을 처리해야 한다. 여하튼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났다.
사실 이 여행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반년 전부터 준비하고 잡아온 계획이기는 하다. 매일매일이 바쁜 와중에 2주나 되는 긴 시간을 어디선가 여유 부리며 지내는 건 직장인에게는 꿈같은 일인데, 그걸 해내기 위해 작년 휴가를 남겨 올해로 이월하고 주변에 미리 이야기하며 착착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 시기에 앞서 회사를 나오게 된 건,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맘 편히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나와 함께한 친구 S는 코로나 전에 가봤던 발리 멘장안이라는 곳을 다시 방문했다. 왜 이곳이냐 하면, 우리는 스쿠버다이버들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를 꼬여서 5미터 깊이의 실내 풀에 집어넣고 다이빙 오픈워터 라이선스를 따게 만든 게 나다. 그저 동남아 파란 바다를 보러 가는가 보다 하고 행복해했던 그녀는 무거운 공기통과 장비들을 들쳐업고 5미터 수심의 수영장으로 뛰어들어가야 했고, 하필 그날 정화시설 모터가 고장 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유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뿌연 상태의 풀장 안에서 친구는 마스크를 벗었다 썼다를 반복해야 했다. 병원도 제대로 없는 외국에서 이러다 나 병 걸리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계속했다고 한다. 나는 꿈에도 그리던 다이빙 자격증을 딴다는 설렘에 뿌연 물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았으나, 나에게 속은 그 친구는 여간 속이 부글거리는 게 아니었나 보다. 훗날 들어보니, 그날 나와 절교하려고 했었다고.
하지만,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다가온 달콤함은 상상을 넘을 만큼 행복했다. 실제 바다로 나간 우리는 너무도 맑고 고요한 바다 안에서 엄마 자궁 속에 있는 것과 같은 편안함을 느꼈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산호초들과 작은 물고기들로 물안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바다로 나간다.
몇 해 전 멘장안을 갔을 때에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의 도시에서 머물렀다. 도시라고 해봐야 그냥 호텔을 나가면 음식점들이 몇 군데 있었고, 옷이나 물놀이 장비들을 살 수 있는 샵들이 몇 군데 있었고, 두어 군데 맛사지샵 중 맘에 드는 곳을 선택해서 갈 수 있는 정도였다. 매일 아침과 오후 호텔과 멘장안을 다이빙업체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은 그다지 유쾌하진 않다. 사실 다이빙을 하고 나서 몸이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차를 나고 한 시간 동안 이동한다는 건 꽤나 찝찝한 경험이다.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은 외진 곳일수록 바닷속은 더 잘 보존되어 있어 아름다운데, 그렇다 보니 다이빙 후 깔끔하게 샤워할 수 있는 곳을 찾기는 거의 어렵고, 수돗물 같은 것으로 얼굴과 몸의 소금기를 대충 흘려보내기만 해도 감사한 경우도 많다. 아름다운 바닷속을 보기 위해 그 정도의 불편함은 웃으며 감수해야 하는 것이 다이버의 숙명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도시가 아니라 아예 멘장안 국립공원 바로 옆의 숙소를 구했다. 소금기 가득한 내 몸이 차 안에서 염장 생선처럼 말려지는 걸 방지하고자 아예 그 스폿으로 우리는 가기로 했다. 이 얼마나 현명한 생각인가? 리조트는 작고 아담하고 깔끔하였고, 숙소 바로 앞의 작은 수영장은 바다에 다녀온 후의 소금기를 씻어내기에도 적합했고, 나무 그늘 아래 썬베드는 과일주스를 먹으며 쉬기에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왜 사람들이 한 시간이나 차를 타고 다니는 거리의 숙소를 정하는지를 우리는 도착하여 체크인하는 순간 깨달아버렸다. 너무 시골이다 보니, 이 호텔은 호텔임에도 카드도 달러도 받지 않았다. 공항의 유심이 비싸다고 동네에서 사자고 했던 우리는 유심을 파는 가게도 환전소도 차로 삼십 분 거리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걸어서 5분 거리의 식당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1킬로미터 이상 걸어 나가야 무언가를 사 먹을 수 있었는데, 우버나 그랩 택시 및 오토바이도 없었고, 호텔 지배인과 영어 소통도 쉽지 않았다. 아 어쩌나, 우리는 여기서 2주를 먹고 자고 다이빙해야 하는데. 상상했던 모든 아름답고 반짝이고 신나는 계획들은 당장 오늘 저녁을 사 먹을 수는 있을까 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불안한 미래에 가려 사라지고 있었다. 집만 나서면 갓 내린 향긋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수두룩하고, 버스와 택시, 지하철은 나를 언제 어디든 데려다줄 준비가 되어있으며, 와이파이와 데이터가 펑펑 터져 해외에 있는 친구와도 소통에 문제가 없었던 서울의 생활에 익숙한 우리들은 졸지에 캐스트어웨이의 톰행크스나 정글의 법칙 병만족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