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거절당하다.

2장. 알고 보니 자유를 얻은 것이었어요 (6편)

by 니나

퇴사를 결정하고 바쁘게 살아온 나를 위로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오래전 이미 결제해둔 여행이어서 퇴사 기념으로 새로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퇴사가 아니더라도 나에게 휴식이 필요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직장인이 2주간이나 발리를 갈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멘장안이라는 국립공원에서 콕 처박혀 있기를 계획했으니, 어지간히도 번잡한 곳에서 도망가고 싶었나 보다.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주변에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이 여행을 가고야 말겠어!’라고 농담처럼 말했더니, 정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래서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그곳에서 나는 해가 지면 잠을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났다. 배가 고프면 먹고, 더우면 수영장에 뛰어들고, 그늘이나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책을 보는, 그야말로 휴식다운 휴식 시간을 보냈다. 회사원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메시지와 전화를 종종 받았고, SNS를 통해 여유롭고 즐거운 나의 일상을 자랑하듯 공유했다. 이제까지는 휴가를 가도, 늘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그럴 때마다 뭔가를 먹거나 새로운 곳을 돌아다니며 애써 머릿속에 떠오르는 할 일들을 외면했지만, 어디 한 구석에는 늘 남아있다가, 결국 휴가 마지막 날에 온전히 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돌아가서 해야 할 회사 일이 전혀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해방감이 몰려왔다. 구름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고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은 어색한 행복감이 파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늘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호기롭게 여행을 준비하고 결제하고 떠날 때야 계좌 잔고가 좀 더 넉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줄어들어 어느 순간 바닥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잔고를 채워줄 회사를 조만간 찾아 지금 쌓아둔 휴식과 체력을 다시 쏟아부어 사용해야 하겠지. 이왕이면 좀 전에 이별한 회사보다는 더 좋은 회사였으면, 더 좋은 자리였으면, 더 좋은 조건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헤드헌터나 리크루터(채용담당자)의 연락에 성실히 답해왔다. 몇몇 외국계와 한국 회사에 면접을 봤고 일부는 좋은 결과도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유명 플랫폼 회사의 모든 인터뷰를 다 통과하고 'Congratulations! (축하합니다)'라는 메일을 받기도 했다. 그 메일을 받은 것이 발리로 떠나기 직전이라, 여행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이제 연봉 협상만 잘 마무리하면 되니 발리에서 푹 쉬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새 회사에서 새 출발 하는 아주 마음에 드는 스케줄이었다. ‘여행에서 돌아가면 새 회사에 잘 적응해봐야지, 이제 진짜 다시 시작이다!’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다. 퇴사하며 겪었던 불합리함이 다 보상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연봉 협상 화상 미팅이 예정된 날, 나는 함께 간 친구를 수영장으로 쫓아내고 와이파이가 가장 잘 터지는 호텔 방 구석을 찾았다. 책상이 없어 작은 티 테이블에 가방과 책을 올려두고 그 위에 가져간 아이패드를 아슬아슬하게 올려 미팅을 준비했다. 와이파이와 테이블 위 아이패드가 아슬아슬하게 불안해서였나, 내 연봉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아무리 내가 급해도 그렇게까지 연봉을 깎아가며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외국계 회사에서는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채용 담당자와 폰스크리닝(phone screening)이라고 하는 전화 혹은 화상 면접을 진행하는데, 이때 채용 담당자는 그 역할에 내가 적합한지를 파악하면서, 현 직장 연봉 및 희망 연봉을 확인한다. 그래서 내 희망 연봉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아도, 현재 연봉을 이만큼 크게 깎아야 하는 수준까지 갈지는 미처 예상을 못 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내가 “혹시 제 채용을 거절하고 싶은데 말씀을 못 하셔서 이렇게 돌려 표현하시는 걸까요?” 라고까지 했을까.


이 미팅 때문에 억지로 수영장으로 쫓겨나 있던 친구는 그 소식을 듣더니 술 한잔 해야겠다며 근처 고급 호텔의 근사하고 비싼 저녁을 선물해 주었다. 그 호텔의 레스토랑에서는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닷가와 저 멀리 짙은 녹음의 숲이 만들어내는 수평선을 볼 수 있었다. 다이빙 투어에 사용하는 보트가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빈티지한 멋을 내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하늘과 바다는 눈부신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그러다 이내 짙은 보라색과 분홍색 그리고 파란색 그라데이션 향연을 그렸다. 화려한 하늘 색깔이 그 아래 잔잔한 바다에 비쳐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하늘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고 백수시간이 좀 더 길어질 나를 축하하듯 이 모든 분위기가 환상적이었다.


그 이후로도 연이은 거절이 이어졌다. 실무자와 내가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 회사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서, 라는 친절한 피드백과 함께 줄줄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그나마도 긍정적이었던 곳은 연이은 구조조정 이슈로 채용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이 휴식 시간을 보내고 나면 곧 출근하겠지, 출근하기 전에 피부과도 가고 헤어숍도 가야지, 라며 기대하던 나는 '내가 부족한가? 그래서 내가 구조조정 대상이 된 것이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점점 위축되고 있었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 급해져서 인터뷰는 심각하게 망가지는 악순환을 그리고 있었고, 내 마음도 같이 망가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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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협상 결렬을 위로하러 간 곳은 근심을 다 잊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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