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집에서 국악 연습실을 가는 길 강변 북로를 탔고, 자연스럽게 해가 지는 서쪽하늘을 마주 보게 되었다. 운전을 하며 좋은 점 중 하나는 전면 유리 가득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유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여주는 스크린이 되기도 하고 인상파 작가의 유화나 수채화 그림 액자가 되기도 한다. 정지 신호에 대기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와 아이 손을 잡은 엄마, 씽씽이를 타고 가는 아이와 그 보다 더 빨리 지나가는 자전거, 시장바구니를 끌고 가는 할머니와 가방을 메고 핸드폰을 힐끔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학생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가 차가 향하는 길을 조금씩 열어주며 나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인도를 걸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강아지 모양, 하트모양 같은 것들이 휙휙 지나가면 방금 있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한껏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 그리고 오늘 강변북로에서는 주황색과 흐릿한 노랑, 연녹색과 하늘색 그러데이션에 불타는 태양을 닮아버린 듯 황금 노란색과 주황색, 산호 분홍색의 구름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그 구름은 태양에 맞서고 있어 이글거리는 노란색 뒤로는 회색 그림자가 생겼고 하늘색과 대비되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늘이 이렇게 예뻤나. 오늘도 하늘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밤에는 소나기가 오고 아침에 맑게 개며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동남아 날씨를 닮아가서 그런지 뭉게구름이 부쩍 많아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여름에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손이 시리던 겨울에도, 놀러 나가기 좋았던 봄에도 하늘은 예뻤다. 뭉게구름인지 파란 하늘인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부순환로나 강변북로, 올림픽 대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탁 트인 하늘은 매일 다른 모습이었다. 늘 같은 하늘이라고 생각했는데, 단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었다. 왜 이렇게 하늘이 예쁜 걸까. 하늘이 예뻐 보이는 나이가 된 걸까.
나의 20대 끝자락에 50대 끝자락이었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젊은 시절 간염에 걸려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오십이 넘어가면서 간경화가 시작되었고 간암이 생겼고 환갑이 지나기 전 식도정맥류 출혈로 집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그날 나는 퇴근하고 헬스장에 들러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라커에 두어 다급한 엄마의 전화를 바로 받지 못했고, 부재중전화가 열 통이 넘게 쌓인 후에야 비로소 엄마와 통화할 수 있었다. "아빠가 쓰러지셨다. 병원으로 지금 가고 있어." 나는 머리를 채 말리지도 못하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서울역으로 향했다. "부산 가는 가장 빠른 표 주세요." 취소표 구매 창구에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KTX티켓을 한 장 샀다. 그 후로 병원까지 갔던 길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병원에 도착해서 엄마에게서 아빠가 피가 많이 나왔고 지혈을 하기 위해 위에 풍선 같은 것을 꽉 끼어둔 상태라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뭐라고 아빠가 말을 했는데 잘 들리지 않아 내가 뭐라고 했던 것 같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다음은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는 내가 뭐라고 아빠에게 말을 하자마자 내 팔을 잡고 획 잡아당기고 말했다. "아빠한테 짜증 내지 마." 15년 전의 일이다. 그 장면을 잠시 떠올린다고 다시 가슴이 아플지는 몰랐다. 그냥 기억인데 가슴에 진짜 뭐가 생긴 것처럼, 바위를 뚫고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찡하고 아프다. 그때 나는 왜 아빠한테 짜증 섞인 말을 했던 걸까.
기억은 많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극단적으로 행복했거나 미안했거나 슬픈 느낌을 머금은 기억은 강렬해졌다. 이 기억을 떠올리려고 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늘을 보면, 특히 오늘처럼 할 말을 잊게 만드는 하늘을 보면, 누구라도 붙들고 저 하늘 좀 보세요 라는 말을 하고 싶은 날이면 아빠가 쓰러졌던 날이 생각난다. 아빠가 쓰러진 후 엄마와 나는 하루 두 번씩 열리는 중환자실 면회시간을 기다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해서 상추쌈을 먹었다. 그 시절 유일하게 엄마가 삼킬 수 있었던 건 상추쌈밥이었다. 상추를 한두 장 펴서 밥을 한 숟가락 넣고 쌈장을 조금 올려서 먹었다. 그거라도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우리는 채비를 하고 302번 좌석버스를 타고 부산대학병원을 갔다. 가는 차 안에서는 별말이 없었다. 그냥 창밖을 쳐다보다가 어제 꾼 꿈이야기를 했다. 꿈에서 본 뭔가가 좋은 징조는 아닐지, 길몽은 아닐지, 희망을 붙들고 싶은 이야기들을 했다. 휙휙 지나가는 건물들을 보다가 하늘을 보다가 버스를 타는 사람들을 보다가 엄마랑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이 끝나고 한참 지나 아빠의 유품들을 정리할 때 엄마가 아빠가 보냈던 문자를 하나 보여줬다. '여보, 하늘을 좀 봐요.' 그날은 아빠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쭉 집에만 있었고, 엄마는 친구들과 기장 부근 어딘가에 쑥을 캐러 갔었다고 했다. 쪼그리고 앉아 쑥을 캐고 있는데 아빠 문자가 와서 봤더니 생전 낭만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그래서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이 참 예뼜다고 했다. 같이 간 아줌마들에게도 하늘 좀 보라고 우리 애아빠가 하늘 보라고 문자를 보냈다고 이야기했단다. 아마도 아줌마들은 까르르 웃으며 그 집 양반 멋있네 우리 집 인간은 그런 거 없는데, 뭐 그런 농담들을 주고받았을 거다. 하늘은 맑았고 쑥은 향긋했고 엄마는 기분이 좋았던 날이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란 쑥을 캔 엄마는 잘 말리고 곱게 갈아 쑥떡을 만들었다. 찰지고 향긋하게 만들어진 떡은 냉동실로 들어갔고 한동안 아빠의 저녁 메뉴가 될 참이었다. 쑥이 간에 좋다고 아빠 먹기 좋게 쑥떡 해주겠다고 그날 아줌마들을 동원해서 기장엘 간 거였다. "여보 참 맛있게 잘 됐네." 라며 좋아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아빠는 쓰러졌다.
한동안 엄마는 그 문자를 이야기했다. 멍하니 하늘을 볼 일이 생기면 그 문자를 이야기했다. 쑥이 돋아날 계절이 되면 그 이야기를 했다. 그전에는 하늘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문자 때문에 하늘을 보는 건지, 하늘을 보면 그 문자가 생각나는 건지 헷갈리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그 후로 엄마 핸드폰은 서너 번 그 이상 바뀌었을 거다. 지금 핸드폰에는 그 문자메시지가 없겠지. 그래도 하늘을 보면 엄마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쑥 캐러 갔는데 아빠가 하늘 좀 보라고 문자를 보냈었다." 엄마도 나처럼 하늘을 보면 아빠가 보냈던 문자가 생각나려나. 아마도 그렇겠지.
차가 밀리는 틈을 타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테라스에서 매일 하늘 사진을 한 장씩 찍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지금 하늘 장난 아니야. 테라스 나가서 사진 찍어!" 이미 새벽에 비행기가 이륙하는 하늘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이 하늘을 또 찍어주었으면 했다. 알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카메라를 드는 소리가 들리면서 말소리가 줄었다. 혹시 통화를 끊으려나 싶어 다급한 마음에 "나 데리고 나가!"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남자친구는 "데리고 나가라고?" 라며 큭큭 웃었다.
오늘 이 하늘을 같이 보고 싶었다. 아빠가 쑥 캐러 간 엄마와 그날 하늘을 같이 보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남자친구가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오면 나는 그 사진을 보고 우리가 같은 하늘을 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 비슷비슷해 보이는 하늘 사진이 많이 쌓여도, 이 하늘 사진만큼은 기억해서 '이 날 내가 찍으라고 해서 이 사진 건진 거야.'라고 생색을 낼 테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여보, 하늘을 좀 봐요.'라고 했던 아빠의 다정한 문자를 기억할 테다. 그 문자를 기억하며 다정한 아빠를 추억할 엄마를 생각할 테다. 하늘 너머에는 우주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 사진을 볼 때는 저 하늘 너머에 아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