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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Nov 06. 2024

[소설] 밤을 지새우는 남자

찬이 아빠는 그곳을 사랑한다. 새벽이 되면 통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해가 꼬리를 길게 늘어뜨려 반짝이는 타일 바닥부터 빨래를 개는 넓은 탁자, 그 아래 손수레, 그 뒤로 창밖을 바라보고 앉을 수 있는 창가 테이블과 의자를 훑고 지나간다. 창가 테이블 뒤로는 커피 자판기가 있어서 천 원이면 스타벅스 못지않은 원두커피를 한잔 먹을 수 있다. 찬이 아빠는 빨래를 돌릴 때면 천원을 준비해 커피를 뽑아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보기도 한다. 책이라고 해봐야 무인세탁소 사장이 마련해 둔 철 지난 잡지 몇 권이긴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보고 사람들이 뭘 입고 뭘 먹나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게다가 커피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장이 신선한 원두를 채워주는 덕에 가끔은 세탁소에 볼일이 없을 때도 이곳에 들러 커피를 뽑아가곤 했다. 


주로 야간작업이 끝나고 작업복을 세탁하기 위해 새벽에 들르는 곳이지만, 한 달에 한 번쯤은 찬이를 데리고 이불이나 큰 빨래를 가지고 낮에 오기도 한다. 빨래가 다 빠져나간 세탁기와 건조기는 찬이가 좋아하는 금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뻐끔거리고 있다. 그럼 찬이는 그 열린 구멍으로 고개를 쏙 넣어서 마르지 않은 물기를 손가락으로 만지기도 하고, 따뜻한 건조기의 열기를 느낀다. 그럼, 찬이 아빠는 위험한 장난치지 말라고 한 손으로는 찬이 배를 뒤에서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 꺼내와 옆에 있는 소파에 데리고 앉는다. 다시 세탁기로 가려고 하는 찬이를 붙들고 못 움직이게 배를 간질이고 볼에 입을 대고 방귀 소리를 낸다. 까르르 찬이 웃음소리가 다섯 평 남짓 세탁소 안을 가득 메운다. 그럼 가끔 마주치는 인상 좋은 동네 아주머니가 사탕과 쿠키를 꺼내 찬이에게 주기도 한다. 찬이는 그게 좋아서 집에 돌아오면 다음번엔 세탁소 언제 가냐고 다음 달을 기다리기도 했다.


오늘은 밤새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찬이 아빠는 만 원짜리 한 장을 동전 교환기에 넣었다. 500원짜리가 빗소리보다 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둘 넷 여섯 여덟…. 세어보니 20개가 맞다. 중 사이즈 세탁기에 작업복 티셔츠와 바지, 잠바, 양말까지 모두 넣고 표준 코스로 돌렸다. 세탁에 동전 12개를 쓰고 건조에 6개를 쓸 거니 남는 천 원으로 커피를 뽑았다. 커피를 들고 창가 테이블로 갔다. 창가를 등지고 앉아 돌아가는 세탁기를 응시했다. 휴, 힘든 날이었다.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지만, 이런 날 야간작업은 더 힘이 든다. 물에 젖어 무게는 더 나갔고 바닥이 미끄러워 미끄러질 뻔했다. 다음에는 고무장화를 신지 말고 운동화나 등산화를 신어야 할지 생각했다.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 무인세탁소는 밤에 보면 시골 버스 정류소처럼 혹은 밤바다 등대처럼 조용한 빛을 내고 있다. 새벽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에 홀로 커피를 마시며 돌아가는 세탁기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은 흡사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나이트호크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세탁소 안은 그리 고독하지 않다. 원한다면 텔레비전을 틀어볼 수 있고, 더울 땐 에어컨도 공짜다. 음악방송을 틀어두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예능을 틀어놓고 배를 쥐고 웃는다. 여기가 아니라면 언제 이렇게 크게 웃고 웃어볼까. 하지만 가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날에는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세탁기의 규칙적인 소음을 듣는다. 그리고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복기한다. 작업할 때 혹시 실수한 것은 없었는지, 빠뜨린 것은 없었는지. 샅샅이 기억을 해부해 보고 이상이 없다 싶으면 그제야 안심한다. 빨래가 한쪽으로 쏠렸다가 떨어지며 털썩 소리를 내다 35분이 지나자, 슈베르트의 송어 노래가 나온다. 빨래가 끝났으니, 문을 열고 건조기로 젖은 작업복을 옮긴다. 작업 복기도 끝났겠다 남은 시간은 커피를 천천히 즐기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린다. 


24시간 무인세탁소지만 굳이 밤에 열어둘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늦은 밤에서 새벽까지 인적이 드물다. 그 시간 들르는 고객은 찬이 아빠 말고 또 있을까 싶은 정도니까. 아마도 찬이 아빠는 그런 이유로 이곳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새벽 동트기 전 혼자 하루를 마무리하는 굽은 등,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온기가 손으로 전달되며 느껴지는 위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만의 비밀, 집으로 가 찬이를 만나기 전에 씻어내고 싶은 지독한 시취(屍臭). 


찬이 아빠는 커피를 소리 내 마시며, 커다란 부엌칼에 일그러진 얼굴을 미처 들지도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던 그 사람의 옆모습을 생각했다. 늘 겪는 일이지만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을 보면 그다음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이 떠올라 귀찮아진다. 하지만 그 표정은 동시에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들, 귀찮지만 그것들을 청소하는 위대함 같은 감정을 찬이 아빠에게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조용히 그 표정을 잠시 내려다본다. 일그러진 이마 주름과 시옷으로 내리막길을 만드는 눈썹, 벌리지도 다물지도 못하는 입술, 덜컹거리는 트럭 뒷좌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흔들리는 뒤통수. 곧 있으면 사라질 강렬한 생명이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 찬이 아빠는 그 생명을 이 세상에 허락할지 말지를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의 끝은 늘 같았다. 그가 이 세상에 굳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그 짧은 시간 동안 찬이 아빠는 찾지 못했다. ‘그러게, 낮에 나한테 왜 짜증을 냈어.’ 나지막이 속삭이던 찬이 아빠는 부엌칼을 든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이어 내려 찌르는 칼날, 신음 소리, 피부를 뚫고 화산의 용암처럼 튀어 흘러나오는 피, 들어가는 칼날과 나오는 핏물의 작용 반작용. 곧 이어지는 잠잠한 표정. 흔들림은 사라지고 다시 밤은 고요해졌다. 클라이맥스는 끝났고 고단한 결론만 남았다.


마지막은 늘 이 세탁소다. 동그란 통 안에서 털썩거리며 핏물의 흔적을 지워주는 세탁기를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다. 깨끗해진 작업복을 꺼내 두 손으로 들어 펼쳐보았다. 찬이 아빠는 그 더러운 것들을 이 지구상에서 치워주는 자신은 이 세탁기만큼이나 헌신적이고 성실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멀리서 해가 뜨고 있다. 땅바닥에 붙은 노랗고 빨간 실선이 점점 그 몸체를 키우며 어둠을 위로 몰아내고 있다. 그리고 길게 꼬리를 만들어 세탁소 바닥 타일을 훑다가 이내 찬이 아빠의 신발과 바지를 비춘다. 건조기에서 보송보송한 새 옷을 꺼내며 찬이 아빠는 완전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작업복을 빨기 위해 이곳에 오는지, 이곳에 오고 싶어서 빨랫거리를 만드는 건지 가끔은 헷갈린다. 찬이 아빠는 이곳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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