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고전은 대체로 어렵거나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침대나 소파에 파묻혀 여유 있게 책을 읽고 싶다거나 스토리에 푹 빠져 밤새 독파하고 싶을 마음일 때는 검은색 배경의 문학동네 고전들과 흰색 배경의 민음사 고전, 초록색 배경의 현대지성 책들을 슬그머니 피해 간다. 왠지 머리를 더 써야 할 것 같고 인생의 고뇌를 느껴야 할 것 같고 책상에 앉아 독서노트를 꼼꼼히 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서재나 거실에 고전책들이 보이면 왠지 집주인의 문해력이 남다를 것 같고 나보다는 지적 수준이 높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최근 '고전은 어렵고 지루해'라는 나의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깨버린 책을 발견했다. 10대 때부터 필독서라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들었던 조지 오웰의 <1984>를 이제야 만났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독서노트와 펜을 옆에 두고 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독서가 끝났을 때 노트에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메모하기 위해 문장과 문장사이를 잠시 멈출 생각을 하지 못했고 1,2,3부 사이 숨 돌리고 쉬어가지도 않았다. 등장인물이 많거나 복잡하지 않았고, 난해한 문장이나 개념이 나오지도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엔 주인공 윈스턴 직장의 모습, 일의 구조, 동료들에 대한 상세 설명과 묘사, 집안과 이웃의 풍경, 더럽고 찌든 생활의 흔적, 그 사이사이 이해하기 싫지만 완벽하게 상상되는 텔레스크린의 존재가 있었다. 윈스턴이 보고 경험하는 일상에 대한 묘사도 훌륭했다. 그를 둘러싼 회색 오세아니아와 끔찍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도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그보다 나는 텔레스크린의 존재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텔레스크린에서 나오는 아침 체조 구령소리, 증오가 시작될 때의 무시무시한 굉음,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한 호통소리들로 인해 소설을 보는 내내 나는 윈스턴이 느끼는 초조함과 불안, 답답함을 함께 느꼈다. 가끔은 윈스턴보다 더 긴장한 상태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지트에서 줄리아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짧은 낮잠을 잘 때조차, 독자인 나는 그가 갑자기 체포되진 않을지 뒤가 밟히진 않을지 조마조마했다. 그 감각은 책을 내려놓고 잠시 쉬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윈스턴의 생각과 행동에 더 집착하듯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흡사 깜깜한 지하 동굴을 들어갈 때 보이는 것이라곤 앞사람의 뒷모습과 그 사람이 손에 든 촛불의 빛이 동굴에 흔들리는 것 밖에 없을 때, 앞사람의 뒤통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느낌과 비슷했다.
이 책을 알기 전 나는 역사 속 전체주의 국가와 지배층, 피지배계층의 모습들을 파편적으로 보면서 개성과 인간성을 말살당하고 전체를 구성하는 먼지로 전락한 인간들을 보면서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그 역사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고, 먼 옛날 유물이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리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작년 12월 4일 조각났지만 그럼에도 내 자유가 송두리째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감각일지 상상만으로는 부족했다.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면 위험에 노출된다. '만지면 안 돼, 뜨거운 물건이야.'라고 친절히 알려줄 어른은 없다.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엔 이미 머리가 커져버렸다. 그럴수록 책과 이야기의 힘은 강렬했다. 나는 윈스턴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전체주의를 조금 경험했고 경악했고 희망을 품었다가 의심했고 절망했다.
주인공 윈스턴은 국가와 권력이 하는 일에 따라 틀림(거짓말)이 될 수 있는 과거자료를 찾아 삭제하고 고치는 일을 하는 마흔아홉의 중년 남성이다. 결혼했지만 부부간의 애정에 대한 개념이 완전 다른 아내와 떨어져 지내며 텔레스크린이 닿을 수 없는 집안 작은 공간에서 몰래 일기를 쓰기 시작한, 전체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빅브라더를 타도할 수 있는 '형제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금지된 장소인 프롤레타리아 생활 지역에 가기도 하고 위험한 생각을 하며 일기를 쓴다. 그리고 그와 생각이 통하는 검은 머리에 젊고 활력이 넘치는 줄리아에게 갑작스럽게 사랑고백을 받는다. 그 사회에서 사랑은 금지된 감정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규칙을 깰 수 있는 과감함이 불현듯 생길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니까. 사랑은 국가와 빅브라더에 대해서만 허용되었다. 그러니 그 둘의 사랑은 전체주의가 시작된 수십 년 전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달콤한 진짜 초콜릿, 향기로운 진짜 커피와 같은 것이었다. 그 향과 맛, 감각은 진짜지만 너무 귀해서 맛보기 힘든, 그러나 한 번 맛보면 헤어져 나올 수 없는 강렬한 그것. 그러나 초콜릿 단맛과 커피 향이 오래갈 수 없듯 결국 둘의 애정과 아지트는 사상경찰에게 발각이 되고 만다. 이는 윈스턴이 믿고 따르던 내부당원 오브라이언을 주축으로 한 함정이었다. 체포되기 전 윈스턴은 한 번 마주친 눈빛으로 그를 믿어버렸다. 그리고 그를 통해 형제단의 존재를 확인했고, 언젠가는 되찾을 개인의 자유를 위해 행동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 믿음이 어찌나 강했던지, 나도 깜빡 속아 거의 책 결말까지 오브라이언을 의심하지 못했다. 분명 오브라이언은 형제단일 거야. 지금 윈스턴을 체포해 고문하더라도 당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일 거야. 언젠가는 탈출하거나 윈스턴을 구해줄 거야. 같은 헛된 희망.
만일 책의 내용이 그렇게 흘러갔다면 나 같은 독자의 마음은 조금 편했을 거다. 어떻게든 인간성을 지키고자 하는 윈스턴을 영웅으로 바라보며, 그를 도운 조력자 오브라이언을 흠모했을 거다. 그가 지켜낸 줄리아에 대한 사랑에 눈물을 쏟으며, 그래 인간이란 원래 이런 거야 라며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추앙했을 터였다. 하지만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전혀 아니다. 오랜 고문으로 해골같이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빨이 빠져 흉측해진 윈스턴은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자유는 굴종, 둘 더하기 둘은 다섯, 신은 권력. 이 같은 전체주의의 슬로건을 스스로 믿고 적어가는 지경까지 가서도 그는 줄리아를 배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마지막 101호에서 그는 굶주린 쥐가 있는 철망에 얼굴을 넣어야 한다는 공포를 마주했을 때 (그는 지독히도 쥐를 무서워했다) 결국 절규했다. 나 대신 줄리아를 넣어요!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 자유의 박멸, 감시와 탄압. 그것뿐이 아니었다. 정말 무서운 건 과거를 삭제하고 변형하여 현재와 미래를 조정하는 것, 그로 인해 발생되는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을 둘 다 받아들이는 이중사고에 익숙해진다는 것, 나아가 '신어'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단어를 축소하고 그로 인해 사고의 폭을 좁혀간다는 것. 윈스턴처럼 내적으로 개성적 존재를 인식하되, 외적으로 남들을 완벽히 속일 수는 없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전체주의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전체주의의 구조 안에서 희망은 없었고 윈스턴은 줄리아를 배신했고 결국 빅브라더를 사랑하고야 말았다. 처절하게 거절하는 인간과 그 인간마저 철저하게 개종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공포를 발견했다. 그것은 '거봐 뜨겁잖아 조심해야지' 같은 어른의 말이었다. 그래서 전체주의가 정말 무서워졌다. 그리고 공포는 나의 실생활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다 알고 있는데도 버젓이 거짓말을 하거나 떳떳한 정치인을 보며 이중사고의 위험을 느꼈다. 이미지메이킹과 의도적 거짓말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며 국민들의 사고능력을 제한하는 행태를 보며 그 정치인에게는 분노가 일었고 비판적 사고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겐 실망을 넘은 절망을 느꼈다.
전체주의에는 희망이 있을 수 없다. 거짓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설픈 지성은 무지보다 위험하다. 자유를 기반으로 개인의 개성이 인정받을 때 사회는 다양성을 받아들이며 성숙해진다. 전체를 위한 단일화된 생각과 움직임은 흡사 그것이 더 빠르게 목표에 도달할 것 같은 착각을 주지면, 실상 그것은 썩고 부페하며 결국 도태되고 후퇴한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기록을 수정한다고 없는 일이 되지 않는다. 윈스턴의 말대로 그건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 속에 남아있어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한강작가의 노벨상 수상소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기억하는 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더욱 정치권력의 전체주의와 의도적 거짓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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