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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어둠을 경험한 푸르름

크리스티앙 보뱅의 <환희의 인간>을 읽고

by 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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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보뱅을 두고 사람들은 시인, 에세이스트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의 책을 특정한 무엇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번에 읽은 <환희의 인간>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가 무엇일까. 글쓰기 강좌를 들을 때 어떤 시인에게 에세이와 소설의 차이에 대해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건 작가 스스로에게 달려있어요. 실제 겪었던 일을 쓰되 일부는 감추거나 굳이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죠. 그래도 그게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에세이이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들었던 당시에는 소설은 허구, 에세이는 실제 이야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할까 싶다.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요즘 나는 '내가 쓴 글은 모두 내가 겪은 일'이다. 자아가 분리되고 주변인물들에 가면을 씌우고 새로운 화자를 창조하여 그게 어떤 이에게는 소설로 보이더라도 그건 내가 겪은 일이다. 그래서 소설을 허구라고 단순하게 구분 지을 수는 없게 되었다. 오히려 소설은 진실에 가까우니까. 허구적 설정과 극적인 묘사로 인해 사실보다 더 사실 같고 진실에 바짝 다가가있다. 그래서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은 소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직접 겪어 더 아름답고 진실된 소설.


짧은 이야기들이 이어지기 때문에 책 어디를 펼쳐서 봐도 상관없다. 어떤 글이든 보뱅의 아름답고 절절하고 냉정한 문장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우선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보고 그 후 마음에 드는 장을 열어서 다시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뱅의 감정선을 따라가고, 이어 책의 제목인 '환희의 인간'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글의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야기는 뒤에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또한 중간에 나오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자필 문장들을 놓치지 않고 읽어봐야 한다. 그중 가장 첫 문장은 이것이다.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이런 문장을 탄생시킨 작가의 책을 어찌 안 읽어볼 수 있겠는가. 그의 글이 만들어내는 기적,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내는 마술과 같은 과정, 그 안에 숨겨진 보석 같은 단어와 문장들을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이런 문장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적을 만날 때 눈을 감아버린다." 또 이런 문장도 있다. "곧 저버릴 벚꽃이 더 환하게 웃는 법이다." 이 짧은 문장들은 앞뒤의 글을 연결하면서 보뱅의 생각을 추측하고 이해하고 따라가는데 도움을 준다.


보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서문에 다 나온다. 서문 마지막을 보면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 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름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같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 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끝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보뱅은 절망의 끝에서 돌아와 하늘의 푸르름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다. 서문만 봐서는 무슨 말인지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책을 읽어볼 차례다.


책은 야생과 순수함이 결합된 숭고한 존재, 보뱅이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상인 마리아에 대한 글로 시작한다. 죽음의 어두움을 만나고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보뱅이 도달하고자 한 존재, 그것은 집시일수도 고양이나 접시꽃일 수도 있다. 그 존재는 검은색의 화가 술라주와 다리를 꼬고 흥얼거리며 바흐를 연주하는 글렌 굴드가 되기도 한다. 이어 책은 죽음을 마주한 보뱅의 기억으로 옮겨간다. 자연과 빛나는 연인의 얼굴, 삶과 죽음의 결합으로 책을 써왔음을 고백하며, 그녀의 죽음 이후 다가온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오히려 꽃의 향기로 채워져 있다. 그녀와 함께 한 글쓰기를 기억하고, 이제는 곁에 없는 그녀를 홀로 이 페이지에 남아 허공에 부른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보뱅은 그저 허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아내)를 잃은 후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했다 고백하지만, 협죽도로 분하는 애도의 과정을 지나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죽음을 걸어서 건널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아내)의 죽음으로 책마저 읽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야생과 순수함, 특히 꽃으로 우울과 애도와 일상 사이에 생겨버린 구멍들을 메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후로는 글을 쓰기로 한 보뱅의 결심, 고통과 죽음 속에서 결국 그를 지탱하고 구원한 것은 책과 활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삼일 밤낮으로 읽어낸 조지프 콘래드의 <태풍>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재앙(태풍, 그녀의 죽음)을 만나 죽음에 기댈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치열하게 이겨내 무사히 귀환하는 전복 (죽음에서 삶으로의 전복)을 이야기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보뱅이 극한의 상황까지 갔지만 결국 전복해서 살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책의 중반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하여 삶으로 돌아오고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었을까가 궁금해진다. 풀을 뜯어먹는 말의 모습에서 테이블에 놓인 꽃다발에서 보뱅은 순수함, 생명의 우아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태양보다 더욱 혹독한 태양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은 기적과 같아서 아주 잠시 금빛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지만 이내 사라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고, 그러나 그 일상은 이제 예전과는 같을 수가 없다고. 이어 단테의 <새로운 삶>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사실 보뱅의 이야기인 셈이다. 단테는 연인 베아트리체의 죽음 이후 사랑과 존재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글을 쓰는데, 아마도 보뱅은 그 글이 자신을 위한 글이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뱅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진 존재인 아버지(알츠하이머)가 기억을 잃어가지만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비록 아버지는 보뱅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잊지 않는 녀석'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 전 신에게 외친 연약한 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을 통해 그를 가까운 존재로 인식한다. 이것은 우리를 죽이는 것들에게 계속해서 애정 어린 말을 건네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한다. '어둠이 짙어져야만 별은 드러난다'라는 문장을 통해 보뱅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태양같이 다채로운 색상의 신비로운 치마를 구매하고 잠시동안 빛나는 무용수가 되지만, 비참하게 늙고 녹아내린 거지여인에게 그 치마를 기꺼이 내주는 집시 여인의 이야기에서 고결한 기쁨과 찬란함이 무엇인지를 논한다.


마지막으로 존재하지 않는 문을 여는 열쇠를 가진 철학자 이야기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문이 없기에 그 열쇠는 쓸모가 없다. 그럼 우리는 다른 세상을 갈 수 없느냐? 아니다 철학자는 이곳에는 우리의 향기, 우리의 색과 웃음이 있다고 한다. 그 웃음이 바로 다른 세상의 시작인데 왜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찾느냐는 일침을 날린다. 이제까지 보뱅이 발견한 빛나는 것들, 집시, 고양이, 꽃다발, 데이지 한 송이, 가시나무 한 그루 그것들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웃음, 알고 보니 그것들이 모두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보뱅은 글쓰기를 통해 사실 문은 필요가 없으며 어쩌면 이미 열려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 과정과 깨달음을 이 책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 열린 문을 통해 바라본 하늘의 푸르름 안에서 웃음소리를 듣고, 그리고 우리에게 이 푸르름을 선물했다. 서문의 말이 이제 이해가 되는가? 보뱅은 죽음의 어두음을 이미 경험하고 비로소 찾은 푸르름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걸 깨닫자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 환희의 인간 보뱅이여!


죽음, 죽음을 껴안은 삶, 삶을 구성하는 야생의 순수함. 죽음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반추하고, 죽음에 가까울수록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음을 발견하며, 기꺼이 내놓는 찬란한 집시의 마음과 연약한 신(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극한의 자연과 운명 앞에 나약한 우리들을 위로한다. 아내의 죽음을 통해 삶과 인간의 본질을 깨닫고 그 기쁨을 공유한다. 역시 시인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표현, 심사숙고해서 고른듯한 단어들, 버릴 것 하나 없는 문장들은 왠지 모를 나른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의 나른함 같기도 하고, 늦은 오후 그 곡을 연습하는 연주자들 뒤로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을 바라보는 기분 같기도 하다. 그것은 완벽한 텍스트와 이미지의 짜임으로 보뱅이 이끄는 데로 숨을 쉬고 눈을 뜨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뱅이 본 술라주의 그림, 그가 들은 글렌 굴드의 바흐 연주, 그가 읽은 <태풍>, <새로운 삶>을 함께 찾아보며 천천히 글을 따라가는 것도 좋겠다. 보뱅의 감정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 쌓게 되는 앎과 교양은 이 책을 읽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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