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를 위로하는 횡재의 정체, 비상금

2장. 알고 보니 자유를 얻은 것이었어요 (12편)

by 니나

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다고 한 어린이날이다. 물론 비는 내리고 있지만 서울은 남부지방보다는 비의 양이 적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기대보다 비가 적게 내리고 있어서 약속을 취소한 것을 아주 잠깐 후회했지만, 솔직하게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백수는 좀 여유로운 줄 알았더니, 아니 웬걸 회사원일 때보다 더 바쁘다. 시간이 많은 줄 알고 '얼굴 한번 봐'라고 할 때마다 덥석덥석 약속을 잡았더니 지지난 주에는 일주일 동안 10건 이상의 약속에 나가기도 했다. 하루는 약속 장소에 나가기 위해 샤워하고 단장을 하는데,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이 노랗다 못해 누렇게 뜬 거였다. 평소 잘하지도 않던 파운데이션을 눈 밑에 덕지덕지 바르고는 하얘져 버린 내 얼굴이 가부키 배우처럼 너무 어색해 아이라인까지 그렸었다. 저녁 술 약속까지 ‘내 체력아, 무사히 버텨다오!’를 중얼거리며 종합비타민, 비타민C는 물론 밀크시슬과 홍삼도 꺼내 먹었었다. 내가 아마도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친구와 지인 들은 '오늘 뭐 해?'라거나 '이번 주말 뭐 해?'라고 간혹 메시지를 보내곤 하는데, 그때마다 '미안해 지금 약속이 있어서 나와 있어.' 라거나 '미안 그때 약속이 있어. 그다음 주는 어때?'라고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너 쉬는 동안 할머니한테도 가고 엄마 볼일도 좀 같이 보고 그러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바빠?'라며 볼멘소리한다. 그러게, 엄마 딸이 너무 바쁘네, 그러니 미리미리 줄을 서시오~


그래서 비 때문에 약속이 미뤄진 오늘 나는 너무 행복하다. 침대 이불 안에서 더 꾸물거리다가 느지막이 일어나야지. 그다음엔 햇반을 데우고 얼마 전 마트에서 사 온 조미김이랑 참치를 꺼내서 자취생 스타일로 밥을 먹어야지. 안 씻고 모자만 쓰고 나가서 커피를 사 와야겠다. 그것도 귀찮으면 내가 내려 먹을 수도 있지. 그리고 미루고 미루었던 저 책상 서랍을 몽땅 꺼내서 정리하자. 내 방 어딘가에 박혀있을 신용카드도 주말 쇼핑을 위해 찾아놔야 한다.


호젓하게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따뜻한 라테를 호로록 마시며, 남자친구랑 스피커폰으로 어제 친구 A와 다녀온 '테크 북토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속 시간에 여유가 생겨서 어디서 시간 때울 데가 없나 두리번거리다 찾게 된 작은 과학과 인문학 전문 서점이었는데, 나는 이곳이 맘에 들어서 SNS 팔로우를 했고, 어제는 그 서점에서 진행하는 북토크를 다녀왔다. 주제는 ChatGPT였다. 공동 저자 4분이 ChatGPT를 비롯한 AI 기술의 원리와 변천사, 사회 전반에 끼칠 영향과 미래 가능성에 대해 질의응답을 진행하였다. 변화하는 미래에 대해 지긋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사람들은 다소 불안해했지만 나는 한편으론 불확실성에 대해 그리 고민하지는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AI기술이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곳에는 사용되지 않도록 사전에 조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도 이야기했는데, 기업과 개인의 노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보다 정부의 규율을 만들어 제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먼저 나온 것은 조금 아쉬웠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 소리만으로 진득하게 이야기 나누는 이 느낌이 참 좋았다. 우리는 오늘 먹은 것, 재미있었던 것과 같은 소소한 일상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누지만, 새로 알게 된 지식이나 트렌드에 대해 같이 공부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아한다. 내 공간에서 홀로 내 시간을 즐기되 또 한 편으로는 하나의 주제로 느슨하게 연결된 이 정도가 적당한 휴식과 안정감을 주어서 더욱더 좋았다.


라테를 다 마시고 전화가 끝나자 나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서랍의 물건들을 바닥에 와르르 쏟아냈다. 나는 물건을 정리할 때 좀 극단적인 편이다. 버릴 것들을 찾아봐서 솎아낸다거나 밖에 나와 있는 물건을 제자리 찾아서 넣는다거나 하는 식이 아니라, 정리해야겠다 싶은 장소의 모든 물건들을 일단 와르르 다 쏟아낸다. 그래서 생긴 빈 서랍이나 빈 곳에 앞으로 사용할 기능을 새로 정의 내린 후 관련 물건들을 넣기 시작한다. 그래서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다 보니 연중 행사 정도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고, 내 방은 재활용센터같이 물건이 쌓이다가 어느 날 매우 깔끔해지는 과정을 매년 반복하고 있다. 내 컴퓨터 정리도 그런 식이다. 파일과 자료 들을 몽땅 외장하드에 옮긴 후, 포맷으로 밀어버리고 아예 새롭게 파티션을 나누거나 폴더를 만들어서 필요한 파일을 외장하드에서 컴퓨터로 하나하나 옮기는 식이다. 회사 일을 할 때도 종종 그랬다. 며칠의 공을 들여 만든 발표 자료라도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거나 어딘가 내용상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싹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만들기도 했었다. 그러다 밤을 새우기도 했는데, 이제는 밤새우는 것도 체력적으로 쉽지 않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습관을 좀 고쳐야겠다 싶다.


오늘은 4단짜리 컴퓨터 책상 서랍만 우선 정리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는 통장이나 카드, 공과금 영수증, 출장과 여행 중에 생긴 적은 돈과 여권, 기념으로 가져온 교통카드 등을 넣기로 했다. 그런데 뭔가 눈에 낯선 종이봉투가 하나 발견되었다.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려고 열었다가, '유레카! 두 손을 머리 위로 만세~!' 출처를 알 수 없을 것 같은 의외의 돈이 발견된 것이다. 어제는 IRP 계좌 만들고 진짜 백수가 된다는 생각에 우울했는데, 오늘은 가뭄의 단비 같은 비자금이 발견된 것이었다! 창밖에 촉촉하게 내리는 비도 이처럼 달콤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 내가 돈을 여기 넣어두고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는데, 내가 그렇게 기억력이 안 좋아진 것인가?' 한참 시간을 거슬러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가끔 나를 ATM 기계처럼 애용하는 엄마가 생각났다. 그랬다. 엄마는 가끔 은행 계좌에 넣어둬야 할 현금이 생기면, 은행까지 가기가 귀찮아 그걸 그냥 나한테 주곤 했다. 그럼 나는 그 돈만큼을 인터넷 뱅킹으로 내 계좌에서 엄마 계좌로 이체하여 엄마의 은행 업무를 대신 처리했다. 그리고 받은 현금은 외출 시 은행에 들러 통장에 입금해서 빠진 돈 만큼을 메우곤 했었다. 그런데 이 돈은 ATM기로 입금한다는 것을 깜빡하고, 그냥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아둔 것이었다. '오예~! 내 건망증이 나에게 단비를 만들어 뿌려주는구나! 잠깐, 그건 원래 내 돈이잖아? 내 계좌가 이렇게 삐쩍 마른 건 이 녀석 때문이었구나!‘ 잠시 횡재했다는 흥분과 내 건망증에 대한 자괴감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역시 내 인생에 요행은 없다. 결국은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일 뿐 공돈은 아닌 게 되었다.


그래도 정리는 좋은 것이다. 이렇게 횡재 아닌 횡재를 하기도 하지 않는가? 비록 원래 내 돈이긴 했어도, 백수가 된다는 불안감을 이렇게 신나게 불식시켜 주었으니 다른 의미에서 횡재한 거긴 하다. 앞으로의 내 백수 생활에 잠시 요긴한 용돈이 되어줄 이 하얀 봉투가 고맙다. 늘 귀찮다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은행 심부름을 시켰던 엄마가 고맙다. 내일 드릴 어버이날 용돈 봉투를 좀 더 두둑이 마련해야겠다. 물론 엄마는 왜 그런지 도통 알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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