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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02. 2023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김환기 <한 점 하늘> 전시를 보고

부지런한 편은 못 되어서 전시나 공연을 미리 알아보고 예매하고 찾아가는 열정은 별로 없다. 그래도 늦게나마 알게 된다면 최대한 시간을 내서 찾아가서 보고 느끼려고 노력 중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살다 보니 그런 형태로도 괜찮은 전시와 공연들을 놓치지 않고 보는 편인 듯하다. 물론 공연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건 어렵겠지만. 이번에도 그런 바지런함은 아니었지만, 김환기 작가의 <한 점 하늘> 전시를 호암미술관에서 한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전시가 막을 내리기 직전 부랴부랴 다녀왔다. 왜 내가 이제 알았을까, 미리 알았다면 한 번이라도 더 보러 올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보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추상화가 김환기는 개인적으로는 '한국적인 색감과 질감을 너무도 아름답게 캔버스에 펼치는 화백'으로 더 다가왔다. 선명하고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은 적당한 무게감이 묵묵하게 느껴지는 색깔들이, 어딘가 본 듯한 친근한 느낌이라, 잘 생각해 보면 단청의 그것들을 닮은 듯했다. 게다가 서양화가들의 유화와는 다르게 두께감 있게 덧댄 부분은 얼핏 한지의 불규칙한 질감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 그림이 달이든 달항아리든, 매화든, 물병을 든 여인이든, 사슴이든, 십장생이든, 따뜻하고 친근했다. 심지어 차가운 색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푸른색마저 따뜻한 쪽빛으로 달달했다. 


그러던 그의 그림이 어느 순간 그저 달콤하고 따뜻하지만은 않게 느껴진 것은 그가 부산의 삼복더위에서도 다락방에서 허리를 못 펴고 숨이 막히면서까지 그림을 그렸다는 치열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낭만적이게 들리지만 실상 그렇지 않은 '예술과 싸우는 것'이었다. 안 되는 이유와 핑계가 백가지라도 그는 해야 하니까 꾸준히 그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숙연해졌다. 피곤하다고, 별로 쓸 거리가 없다고, 바쁘다고, 쓰지 않고 넘긴 나의 부끄러운 날들이 생각났다.  후기에 가서 그의 그림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찍었던 점들을 별로 우주로 세계로 만들어갔다. 푸른 쪽빛은 더욱더 별을 닮아 따뜻하고 고독했지만, 그 별들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회색의 우울함을 품었다. 왜 예술가는 작품에 죽음이 묻어 나올 정도까지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갈까. 꿈은 길고 세월은 모자라다는 김환기의 서글픈 독백에서 그렇게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의 투혼이 느껴지는 듯했다. 


김환기전은 환기미술관이나 여타의 미술관뿐만 아니라 40여 명의 개인이 가진 소장품까지 한자리에 모인 귀한 전시라고 한다. 다시는 이렇게 김환기의 작품이 모두 모인 것을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니 나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거였다. 원래 계획을 취소하고 호암미술관을 다녀와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의 꿈과 열정, 예술과의 싸움, 그리움, 꾸준함, 치열함을 엿본 지금 리뷰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부끄러움과 그를 향한 우러름,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흐릿해지기 전에 박제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전시를 보고 그가 더 궁금해졌다. 검색하다 그의 부인 김향안을 주인공으로 하는 라흐헤스트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라는 뮤지컬을 발견하고 보러 갔었다. 천재 시인 이상과 한국 추상화의 거장 김환기 둘 모두를 남편으로 두었었던 여인의 강단 있는 인생의 결정과 사랑이야기였다. 서정적인 스토리와 음악들이 가슴을 울린다고 하는데, 나는 그보다 김환기의 작품이 앞으로 더 귀해지고 비싸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작품에 스토리가 입혀지고 있었고, 이러한 (일종의) 마케팅은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리게 했다. 동생 테오와의 편지 속에서 발견한 애틋한 우애와 빈센트의 예술가로서의 성장과 고뇌에 대한 이야기는 전 세계인으로 하여금 빈센트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그의 그림을 더욱 아름답고 값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뮤지컬을, 공연을, 예술을 그 자체만으로 느끼고 즐기지 못하고, 이런 주변의 상황들을 추측해 보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서글펐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순수한 눈으로만 예술을 보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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