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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16. 2023

물건에 영혼이 있다면

은희경의 <또 못 버린 물건들>을 읽고

요즘 시를 배우러 다니는 위트앤시니컬에서는 갈 때마다 한 권씩의 시집을 사서 한 주 동안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 사는 건 쉬운데 읽고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아, 못 읽은 시가 쌓이고 있는 것이 문제 이긴 하다. 그러던 중 내가 찾던 시집이 없어서, 대신 1층 동양서림에서 뭘 살까 고민하다 은희경 작가의 <또 못 버린 물건들>을 골라잡았다. 요즘 잘 쓴 에세이를 찾아보며 공부(?)하고 있어서, 이 책 또한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은희경 작가의 취향과 생활습관과 과거 살았던 지역, 지나간 경험등이 담겨있는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녀의 상념들을 보니, 나 또한 내 방을 차지하면서,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면서도, 전혀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이 차츰차츰 눈에 들어왔다. 그 물건들은 생활의 효율이나 편리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보고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쉼을 주거나, 그 물건을 샀던 시간과 장소, 함께한 사람들이 생각나 쉬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다. 나에게 말을 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저 물건일 뿐인데 서로 다른 온도와 냄새와 실제 무게와는 상관없는 무게감을 준다. 아마도 내가 그 물건에 부여한 의미와 애정들일 것이다.


은희경의 물건들에도 그런 기억과 애정과 사유들이 깃들어있었다. 책도 많이 내고 상도 많이 탄 인정받는 작가니까 당연하다 싶다가도, 긴장도 엄숙함도 없이 수다 떨듯 풀어둔 이야기들을 보다 보면 술술 읽혀서, 옆집 언니나 이모 정도 되는 사람과 차 한잔 나눈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 책은 잘 읽어지지만 매일 조금씩 나눠 천천히 읽었다. 맛있는 음식일수록 빨리 없어지는 것이 아쉬워 접시에 남은 양을 봐가면서 천천히 먹는 그런 마음이라고 할까.


'글을 쓰는 것은 나의 내면을 남에게 내보이고 또 설득하는 일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라는 부분에서는 깊이 공감했다. 글을 쓰는 것이 더 두려워지던 때였는데,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렇구나 생각하며 이 문장을 보고 더 용기를 내보려 했다. '신념을 구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상이 지속된다는 것이야말로 새삼스럽고 소중한 일'이라는 부분도 좋았다. 나의 평범한 하루가 별것 아닌 게 아니라 소중하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상대는 실용성과 효율을 근거로 묻는 것이지만, 나는 매우 사적으로 기분상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쓸모없어 보이는 사소한 물건을 사는 데에는 미묘한 사치의 감각이 있다. (중략) 내가 기능적 인간에서 벗어나 고유한 개인이 되는 듯한 기분과 비슷하다. 내가 되는 기분,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다.'라는 글에서는 그래! 마침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라며 반가워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디서든 자신의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 산책 중에 독서 중에 대화 중에 그리고 물건에서도. 그리고 그 생각이 그 물건에 다시 붙어, 그 물건은 특별한 기억과 생각이 깃든 방금과는 조금 다른 물건이 된다. 만일 물건에 영혼이 있다면, 그건 그 물건을 바라보는 사람의 기억과 상념들이 모이고 뭉쳐져 만들어지는 것일 게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낸 그 영혼이 깃든 물건을 우리는 쉬이 버리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꼭 버려야 한다면 한두 달을 택배 박스에 넣고 두고 보는 헤어짐의 시간을 가져본다거나, 아니면 이사와 함께 한꺼번에 눈 질끈 감고 와르르 정리해 버리는 안타까운 이별 (이별은 짧을수록 좋지)을 하거나. 아무튼 물건에서도 이렇게 멋진 글이 나온다니, 당분간 함부로 물건을 버리기 전에 끄집어낼 글감은 더 없을지 잘 노려봐야겠다. (노려본다고 좋은 글이 나오면 내가 벌써 작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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