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잘 먹고 잘 자고 잘 놉니다 (9편)
이제는 좀 괜찮아질 때도 되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지하철 내릴 곳을 놓쳤다. 타는 걸 놓치는 건 전혀 억울하지 않다. 그냥 기다리면 되지. 그동안 읽을 책도 꺼내고, 가끔 음료수도 뽑아먹고 사람들도 구경하고, 운이 좋아서 플랫폼에 아무도 없을 때는 필름 사진도 찍었다. 다만 요즘 지하철을 타면 맨날 내릴 곳을 놓친다는 게 문제다. 중앙에서 대기하고 양쪽으로 지하철이 오는 곳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않은 곳은 계단을 올라가서 버튼을 누르고 “무슨 일이세요?”라는 질문에 “제가 잘못 내렸어요.”라고 말하고 건너편으로 건너간다. 환승할 때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일은 더 비일비재하다. (나 같은 사람이 많나 보다, 환승 할인에 같은 역 환승이 포함되었다)
내릴 역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느 순간부터 소니 헤드셋도, 에어팟도 쓰지 않고 있다. 아깝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귀는 뚫려 있을 거니 안심하고 책을 봤더니 그래도 놓쳤다. 그래서 도착할 역까지의 시간을 계산해서 알람으로 맞춰두기까지 했다. 일곱 정거장이면 대충 14분 정도 걸린다 생각하고 12분 후 알람이 울리게 설정하는 식이다. 그걸 깜빡한 날은 핸드폰을 하다가도 내릴 곳을 놓친다. 이 정도면 중증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내가 외출할 때면 남자친구는 항상 “지하철 내리는 거 놓치지 말고 잘 다녀와요.”라고 한다.
버스노선도 못 외운다. 버스 타고 회사 다니던 시절, 3년이나 탔던 버스 번호를 외우지 못해 늘 ‘서울역 행’이라는 표시를 보고 버스를 잡았다. 버스 번호를 겨우 외운 건 이직이 결정된 후였다. 지금은 좀 덜 필요하지만 나는 텔레비전 채널 번호도 못 외웠다. 동생이 “누나야 MBC 좀 틀어봐~”라고 하면 늘 항상 한 번도 빠짐없이 “몇 번인데?”라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즐겨보는 '나 혼자 산다' 예능이 무슨 요일 몇 시에 어느 채널에서 하는지 잘 모른다. 그냥 어쩌다 틀었는데 나오면 즐겁게 보는 수준이다. 현관 비밀번호도 잘 못 외운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는 맨 처음 이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인이 2년 전에 보내준 문자를 찾아서 열곤 했는데, 내 집 현관 비밀번호를 모르다 보니, 결국엔 자석 키를 핸드폰에 붙이고 다녔었다.
그래서 해결책을 고민하다가 외출할 때는 일찍 나오기로 했다. 아예 일찍 나와서 카페를 어슬렁거리고, 주변 서점도 들르고, 볼만한 것들이 있을지 기웃거리기로 했다. 그래서 보부상처럼 늘 백팩을 메고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혹시 지하철을 잘못 내려도 별일 없게, 길에서 쓰는 시간을 나름대로 여행으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참, 버스 번호를 못 외우고 텔레비전 채널을 못 외우는 건 그냥 포기했다. 못 외워도 버스 타고 다니는 건 별문제 없었고, 텔레비전을 켰는데 '나 혼자 산다'가 안 나오면 김경일 교수 유튜브를 찾아보거나 보던 책을 보면 되니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집 출입 비밀번호도 못 외우는데 그런 걸 외울 깜냥이 안 되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