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에게도 루틴이 필요합니다

3장. 잘 먹고 잘 자고 잘 놉니다 (8편)

by 니나

하루 7시간 수면

아침 운동 (날씨와 컨디션에 따라 요가, 등산, 달리기, 홈트레이닝, 스트레칭 중 택 1)

오전 글쓰기

점심

오후 독서 및 배우러 가기 (가야금, 소행성, 시 등), 볼일 보기, 호기심 채우기, 사람 만나기

저녁

저녁 글쓰기


‘요즘 뭐 하고 지내요?’ 백수 생활에 접어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간 술자리에서 받은 질문이었다. 나와 같이 직장생활을 했던, 지금도 성실히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종종 궁금해한다. 심심하지 않을까? 회사도 안 나가면 그 많은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을까? 걱정 반 궁금 반으로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나는 의외로 매우 바쁘다. 백수(白手)를 한자로 보면 하얀 손이다. 성인이지만 특별한 직업이 없으니 손으로 뭘 하는 것도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하얀 손이라고 표현한 것일 텐데, 직접 백수를 해보니 百手, 백개의 손이 더 맞겠다. ‘일 때문에 바빠’라는 핑곗거리도 없다 보니 사람들을 여전히 만나고 있고, 의식의 흐름대로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하다 보니,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 들도 꽤 있었다. 이러다 백수가 과로사할 지경이다.


정신없이 한두 달을 지내다가,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어 나름의 규칙과 루틴을 만들었다. 오전 시간에는 운동과 글쓰기 등 꼭 필요한 일들을 한다. 골반이 비뚤어져 있어 가끔 걸을 때 뚝뚝하는 소리가 났었는데, 올해 봄부터는 그곳에서 열감이 느껴지고 걷는 게 영 불편해졌고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등산도 부담스럽고 뛰는 것도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요즘은 추천받은 골반 스트레칭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있다. 한 달 정도 되니 골반에서 이상한 소리도 나지 않고, 자세도 제대로 따라 할 수 있겠고, 무엇보다도 나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리던 생리통이 완화되었다. 요즘은 스트레칭에 이어 여러 가지 근육 강화 운동을 붙여서 하고 있다. 한 시간 정도 땀이 뚝뚝 떨어져 손수건이 축축해질 정도로 운동하고 나면 하루 시작이 개운하다. 그 후 책상에 앉아 2시간가량 글을 쓴다. 어제 정리해 둔 메모와 일기를 토대로 새로운 글감을 쓰기도 하고, 소행성 워크숍에 제출할 원고를 정리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면,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저장해 두었던 글을 다듬어서 발행하기도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말도 안 되는 단편소설이나 그날의 단상을 브런치 작가 서랍이나 노션에 끄적여본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나면, 커피를 마시며 좀 더 느슨해진 마음으로 여유를 즐긴다. 유튜브를 켜서 보려고 저장해 둔 콘텐츠들을 잠시 보기도 한다. 요즘은 주로 심리학 김경일 교수님의 강의를 본다. 강의를 너무 재미있게 하셔서 여느 예능보다도 재미있다. 그냥 바로 눈에 띄는 책을 열어보기도 한다. 가끔 너무 술술 읽어지는 책은 그날 바로 리뷰까지 적기도 하지만, 보통은 한자리에서 다 읽지는 못한다. 예전에는 후루룩 속독하고 대략의 줄거리나 메시지를 파악하는 걸 책을 잘 읽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어보고, 장마다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주요 문장은 무엇인지? 를 찾아보면서 읽다 보니, 읽는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그러나 읽는 양에 욕심내지는 않는다. 옛날 습관이 나와서 빠르게 읽어버리고 나면, 제대로 꼭꼭 씹어 맛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아쉽고, 다시 찾아보다 보니 완독 하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가끔 좋은 글귀는 내 에세이에서도 다뤄봐야지 하는 욕심에 여기저기 줄을 치고 표시를 해두다 보니, 지금 내 책 들은 중고로 팔기도 힘들 지경이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물건을 치우고 책들을 쌓아두고 있다.


만일 사람들과 약속이 있거나, 빌린 책을 반납해야 한다거나,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거나, 갑작스럽게 궁금한 것들을 해결하러 외출하는 그런 일들이 생기면 이 시간대를 이용한다. 책을 조금 보다가 계획한 시간에 맞춰 외출한다. 돌아와서는 메모를 정리하거나, 짧은 일기를 쓰기도 한다.


백수가 된 후 우리 엄마는 내가 밥은 잘 먹는지, 종일 뭘 하는지가 많이 궁금한 모양이다. 별일 없나 싶어 메시지를 보내면, 이때다 싶은지 오늘 무슨 찌개를 했다, 무슨 반찬을 했다고 메뉴를 읊으며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한다. 그럼 나는 마음 한구석이 미안해지면서 ‘안돼 나 일이 있어서 밖이야. 오늘은 바쁘네.’ 같은 답변을 한다. 나는 엄마와 길 건너 대각선 맞은편에 산다. 대각선 맞은편이라고 해도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들어가는 것까지도 꽤 길다 보니 집에서 집까지 도보로 약 15분은 걸리는 편이다. 그냥 밥만 먹으러 왔다 갔다 하기가 생각보다 쉽지는 않으면서도 대각선 맞은편에 산다는 것은 따로 살아도 매 끼니 함께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애매하게 가깝고도 먼 거리다. 그게 종종 엄마를 서운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평일 중 한 끼, 그리고 주말 하루를 엄마와의 시간으로 비워두었다. 밥 먹고 수다 떨고 마트 장 보러 가거나 산책한다.


내가 백수가 되면 좀 자주 볼 수 있을까 기대했다던 남자친구는 내심 아쉬울 거다. 백수가 되어도 여전히 바쁜 여자친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주 1회밖에 볼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얼굴 보고 싶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다가는 내가 해야 할 것들과 하고 싶은 것들을 좀처럼 지켜낼 수 없을 것 같아, 주 1회라는 규칙은 어기지 않고 있다. 다행히 볼멘소리 하지 않고 아직은 내 계획을 존중하고 따라주는 남자친구라 지금의 루틴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나는 내가 만든 루틴을 지켜내면서, 그 단조롭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안에서 나다운 것을 찾고 있다. 나다운 것이라고 함은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 호기심, 뿌듯한 것, 행복해지는 방법, 시간이 빨리 흐르는 인간관계 등 생활에서 나를 관찰하고 실험하며 찾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건강하게 오랫동안 내가 나다울 수 있는 방법들도 함께 찾아가고 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갈 때 즈음,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맘에 드는 잠옷을 입고, 일기를 쓰거나 메모를 정리하면서 오늘의 나를 회고할 때, 나는 아쉽거나 슬픈 마음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루의 끝에 결국 고개를 조아리게 되는 상대는 나 자신이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미안해하지 않으며, 내가 나답게 잘 지냈는지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그리고 동시에 용서한다. 그 하루가 모여 나는 더욱 나다워지고 단단해진다. 그래서 백수의 루틴은 소중하고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다.


‘백수가 왜 바빠?’ 친구가 묻는다.

‘직장인은 회사 일만 하면 되지? 나는 회사 일을 안 하니까 할 게 더 많아. 놀고 배우고 즐길 게 무진장 쌓여있어. 게다가 지난 20년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거든’

'그게 뭔데?'

'나를 찾고 있어.' 내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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