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란 Oct 08. 2023

사랑에 갑을 관계가 있다면

아니 에르노의 <젊은 남자>를 읽고

아주 많은 연애를 한 것은 아니지만, 내 나이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몇 번의 연애와 그 비슷한 썸 같은 것들을 겪으면서 어느 연애든 갑과 을이 존재한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보다 많이 어릴 땐 이 감각이 너무도 선명해서 (아마도 그날그날의 열정에 따라 감정의 표현이 극명하게 선명했던 젊은 시절이었기에 가능했겠다) 오늘은 내가 너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 오늘은 네가 나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라는 식으로 그날의 애정도를 느끼고 평가했었다. 내가 더 좋아한다는 기분이 들 때는 내가 좀 더 주체적이고 원하는 것을 성취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뭔가에 열정을 쏟는 기분이 조금 들어 우쭐하기도 했었다가, 한편으로는 왜 너는 나만큼 지금 나를 생각하지 않지?라는 서운함이 들어 못내 아쉽기도 했었다. 그 애정도에 따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둥, 애정 관계에서 을이라는 둥, 좀 유치한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었다. 


아니 에르노의 <젊은 남자>는 읽는 이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겠지만, (어느 문학이나 예술이 그렇듯) 나는 그 안의 세월을 겪어 성숙하고 더 나은 지위에 있는 여자와 젊지만 가난하고 풋내 나는 젊은 남자의 은근하게 드러나는 권력관계 같은 것들에 좀 더 눈길이 갔다. <단순한 열정>을 통해 작가가 직접 겪었던 일을 발가벗기듯, 더 나아가 해부하듯 속속들이 부셔서 헤뒤집어 드러내놓는 아니 에르노의 글을 먼저 접했었기에, 그 책만큼의 직선적이고 맹목적인 열정이 느껴지지 않아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주저했던 책을 쓰고 싶은 욕망에 평소 나에게 관심 있던 A를 집으로 데려오게 한 것이나 (p.14) '꺼져버려'라는 저속한 명령문을 쓰는 것이나, 그러면서도 내가 그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는 점에서 (p. 28), 그리고 그를 떼어내고 몰아내고 싶어했다는 듯 글을 쓰며 거리두기라는 단호한 전략으로 이별을 노력했던 것 (p. 44) 들을 보며, 주도적으로 어떤 목적을 위하듯 이 관계를 시작하고, 마찬가지로 목적의 빛바램과 함께 이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어낸 것을 보면서, 이 연애의 꼭대기에는 아니 에르노가 있었고 그 아래 A가 있는 듯한 주종관계 같은 상상을 이 책을 보는 동안 끊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동시에 그를 통해 젊었던 시절 - 과거 혹은 추억을 회상하고, (글의 소재가 되었던) 그 시절을 다시 겪어내고 끝을 맺었다. 시절을 먼저 겪은 자로써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경험을 제공하고 금전적인 도움을 주고 남의 시선에서 우월감을 만끽했다.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비일비재한,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른 남성이 어린 여성을 탐하고 그녀를 통해 젊음을 재경험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추억의 반복과 우월감 때문인가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사회는 남녀라는 성에서는 대체로 남성이 좀 더 권력을 쥐고 있는 구조라, 특히 그 시절 아니 에르노의 스무 살 가까운 연하남과의 연애는 매우 특별했고, 그녀가 느꼈을 우월감은 당시 그리고 지금의 남성이 느끼는 감각보다 더 짜릿하고 컸으리라. 그렇게 생각이 들자 나는 통쾌함마저 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판타지가 현실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남녀의 애정관계에서 여자가 갑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며, 나 또한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슬슬 재미있어지면서 읽는 속도감이 올라오는 순간 책은 갑자기 끝을 맺는다. 원래 두께가 얇았지만, 책의 뒤쪽에 프랑스어 원문 전체가 담겨있다 보니, 예상한 것보다 더 글은 짧았다. 아쉬움에 두 번 세 번 다시 책을 펴봤다. 그리고 이 젊은 남자를 만나면서 쓴 글은 도대체 무엇일지가 엄청나게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나는 아니 에르노의 덫에 단단히 걸린 듯하다. 이래서 옮긴이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 세계를 막 탐구하려는 이들에게 <젊은 남자>가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해주리라'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라서' 감히 생각하지 못하거나 표출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있다면,  혹은 남성위주의 시선이 팽배한 문학에서 벗어난 생각을 접해보고 싶다면, 아니 에르노의 책을 한번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솔직한 표현에 가끔 얼굴이 화끈거리다가, 그녀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보편적인 공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그녀의 책을 읽다 발견하는 덤 같은 재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