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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지랑 Jun 14. 2019

상처는 과잉에너지로부터 나온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보통 누군가로부터 어떤 사건으로부터 혹은 어떤 자극으로부터 적잖은 충격이 발생한다.


그런데 그러한 충격이 일정량 이상이 되면 상처가 되어 버리게 된다.


상처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어느 누구도 상처 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심지어 우리는 때때로 상처를 주려고 의도하지 않은 사람들(대부분이다)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인간관계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에 대한 의심이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이 반전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나에게 충격이 된다.

예를 들어 믿었던 애인이 바람을 폈을 경우처럼 말이다.

(사실 애인은 나를 엿 먹이려고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본인에게 큰 충격을 초래하고 상처가 된다.


그리고 다른 경우, 그런 조짐이 있던 애인이 날 의심하는 거냐고 도리어 화를 내기도 한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실을 왜곡해서 주입하는 일종의 가스 라이팅)

그렇게 상처들을 추스르고 더욱 그 사람에게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여 믿으려고 하는 경우에는, 즉 의심이 있어 본인이 힘들었는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애써 부정하고 "저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구나" 본인을 공격하게 된다.

이로써 상대방이 아닌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상처는 자신에게 서서히 내리게 된다.

그리고 정확한 판단력을 잃게 되고 가해자의 말을 신뢰하게 되어 더욱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심한 경우, 공황발작과 같은 일종의 정신장애가 발생하게 된다.

머리로 애써 좋은 생각을 해도,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으로, 즉 본래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공황장애가 적당히 착한 사람들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착한 사람"이란 애초에 무엇인가?

그 정의는 줏대 없이 모든 것을 허용하고 넘어가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건 사실 바보에 더 가깝다..


정말 착한 사람은 본인의 줏대에 맞게 그리고 윤리적 도덕기준에 따라 "상대를 위한 명확한 의사표현"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본점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왜 이 사회에서 서로 상처 받고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것일까?


여기에

바타유라는 학자가 언급하는 "과잉에너지"가 있다.

즉 생산을 위한 이성을 붙드는 것과 반대인 개념으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표출해야 하는 소모적 제의를 설명할 때 이 단어가 서술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살아가면서 쌓아 놓은 에너지들을 소모적 제의를 통해 표출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폭력적이거나 이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술, 공연, 대회, 축제 등은 실질적인 생산을 위한 활동이 아닌 공개적으로 어떤 것을 소모하기 위한 정당한 수단인 셈이다.

 (과거에는 약자를 하늘에게 바치는 제물, 전사들 간의 혈투 관람 등을 뜻했다.)

즉 기본적으로 그러한 성향이 "인간"이기에 내재되어있을 수밖에 없다.


가르치는 아이들을 보면 무엇인가를 정돈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흐트러트리고 마구 섞어버리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아이들도 많기 때문에 이것은 사회에서 쌓아놓은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본성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는 지금 우리는 그렇게 비교하면, 사회를 살아가면서 쌓아놓은 에너지들이 아이들에 비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을 우리는 제대로 표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에너지의 과잉이 일어나게 되면 그러한 기운들이 정신적인 차원에서 이제 신체. 물질적인 차원으로 드러나게 된다.




조금씩 표출하는 사람들보다 쌓아둔 것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더욱 극단적인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파괴력과, 충동성이 커지고 통제력과 이성이 감소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신을 파괴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일례로 그때그때 표현하는 사람들은 가스를 자주 빼주기 때문에 폭발하는 위험은 적어진다.

(가스가 자주 생기는 사람들은 또 다른 문제긴 하겠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참는 일이 많아지는 만큼 우리의 정신건강은 더욱 위험한 셈이다.

그렇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참지 않으면 갈등이 초래되어 정신건강을 더욱 위협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참는 게 본인을 위해서도 좋다.

에너지의 과잉은 어떤 것으로 인한 충격이 쌓이거나, 상처가 깊어지면 과잉화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럴 때는 해당되는 사람이나 사건에 직접 "표출"을 하여 의사를 전달하거나 그것이 잘 안 되는 경우에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내 안의 과잉에너지를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자신과 사회생활을 위해 좋은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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