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아주아주 행복한 사람입니다.
드넓은 우주 공간에서 아주 작고도 작은 지구라는 행성에 사랑하는 부모님을 만나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의 시작이었습니다. 살면서 행복한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그때 누구보다 행복했고 누구보다 즐거운 일이 많았을 겁니다. 다만 행복한 감정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없도록 세상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다거나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현재 어딘가에 앉아 책을 보고 몸을 누일 수 있는 침대도 작은 행복이고 설령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기분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점심 식사 메뉴는 무엇이었나요? 어떤 메뉴를 선택했건 탁월한 선택입니다. 설령 짜인 식단에 의해 차려지는 급식처럼 원하지 않는 메뉴였다고 할지라도 먹고자 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음식물이 투입된 배 속의 장기들을 느껴보세요. 신기하지 않나요? 나의 존재는 크게 느껴지는데 조그마한 장기들이 입과 혀를 통해 맛을 느끼고 위장으로 들어가 소화를 시킨 다음 여러 장기의 분해 효소들로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어 제공합니다. 필요가 없어진 음식물 쓰레기는 밖으로 배출도 하지요. 이들은 잠든 사이에도 멈추지 않고 깨어 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물 한 잔 마시더라도 자각도 하지 못한 틈에 정해진 루틴에 따라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합니다. 장기들은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뇌는 또 어떨까요?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각 모두 뇌라는 몸무게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친구가 관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뇌에 관한 지식이 있다거나 과학자도 아닌지라 정확한 정보 제공은 어렵지만 뇌는 아주 단순한 존재라고 합니다. 현생에 만족하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대로 만족하면 더 나은 만족을 위해 힘쓰며 긍정적인 마음은 긍정적인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고 부정적인 마음은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몸을 병들게도 만듭니다. 어쩌면 우리의 몸은 어느 애니메이션 내용처럼 전체가 온전히 나 자신이 아니라 뇌라는 존재에 의해서 조종되는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기왕에 조종당하는 것이라면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조종당하는 것이 행복한 길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행복’도 사실 정의하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아이의 기준도 부모님의 기준도 당신의 기준도 모두가 다르기에 그렇습니다. 다만 행복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행복한 사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무사히 잠에서 깨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이 감사하고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음에 감사하고 하루를 마치고 샤워 후 잠자리에 누우면 무사히 하루가 지나갔음에도 감사하고 피로를 녹여주는 달콤한 잠에 빠질 수 있음에 행복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모든 순간이 행복으로 가득한데 좋은 것보다 더 나아 보이는 것에 골몰하기에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건강이 좋지 못하다면 위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공통적인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하루만 더 살아보고 싶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소중한 오늘은 오늘까지만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신 오지 않을 선물 같은 하루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선물 같은 하루를 부정적인 마음이 지배하게 두지 않아야 합니다.
하루에 아침에 일어나서 그리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만 자신에게 감사하다고 목소리를 내어 말씀해보십시오. 짧은 목소리 한마디가 하루를 바꿀 것입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을 때마다 원하는 모습을 매일 상상하세요. 상상해야 눈앞의 현실로 나타납니다. 정해진 루틴처럼 매일을 살아가는 로봇처럼 내팽개쳐두지 마십시오.
언제나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순례길을 걷듯이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함께 이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요. 저는 마침내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결코 해답을 알 수 없을 테니까요, 사람의 마음은 결국 어떤 일이 생기든 참아냅니다. 강한 힘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은 살아가는 동안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들어 준 원동력입니다.
동네 뒷산에 올라 보면 풀숲 사이로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길은 모두 그렇게 만들어져 왔습니다. 누군가가 지나간 길을 내가 지나고 내가 지나간 길을 다른 누군가가 또 지나옵니다. 작은 길은 점점 커지고 나중에는 차도 지나다닐 만큼 크게 넓혀져 있습니다. 길이 틀리지 않았을까 의심하지 마세요. 계속 가세요. 마음으로의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타인의 내비게이션보다 마음이라는 나침반을 믿고 가던 길을 계속 가세요. 나침반이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때 다른 길로 발을 옮기면 됩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길이 없는 곳을 나침반이 가리키고 계속 직진만을 명한다면 기뻐하세요. 새로운 길의 최초를 만들어 낸 개척자가 되셨습니다. 새로운 길을 창조해 냈고 그 길은 다른 사람들의 발로 인해 점점 넓어질 것입니다.
때론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편한 길도 가고 싶고 쉬워 보이는 길도 가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도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결단력도 필요합니다. 다른 길에 미련을 둘수록 발걸음은 무거워질 것이며 앞에 예쁜 꽃길이 놓여 있어도 포기했던 곳에 더 좋은 것이 있었지 않겠나 하는 부정적 마음만 피어납니다. 세상에 쉽고 아름다운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나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배 아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과 교류를 통해 정보를 가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혹시라도 예쁜 꽃길을 가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정보를 얻어내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더 나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모두 가졌습니다.
그럴 리 없다며 부정적인 시선을 내보이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때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얼마나 많고 예쁜 꽃들이 함께하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길을 걷느라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주변이 얼마나 예쁘고 반짝거리는지를 몰랐던 겁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바뀐 적이 없고 늘 같은 곳에서 기다렸습니다. 경로를 이탈할 때면 나침반은 계속해서 그곳으로 이끌어 왔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집, 직장, 옷, 차, 맛집, 친구, 동료, 지인 심지어는 길가에 가로수나 산과 바다도 그대로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아주 조금씩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큰 변화는 없습니다.
마음속 나침반은 쉼 없이 변화합니다. 바다를 볼 때 답답하던 때라면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시원한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하고 산을 오를 때 초록색을 보다 보면 회색빛으로만 가득했던 세상이 생기가 돋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다만 매번 그렇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포인트입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상태에 의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시각과 마음에 따라 변화되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당신에게 피해만 끼치는 사원이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달콤한 간식이 책상에 놓여 있습니다. ‘지나가다가 선배님 생각나서 사 왔어요.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오후 시간 보내세요. 선배님 항상 감사합니다.’ 이런 메모와 함께 있는 걸 본다면 흐뭇한 마음이 피어날 것입니다. 굳이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고 나쁘게만 보았던 그 사람에게 아주 잠시일지라도 미안한 감정이 들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 마음의 본질입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러기로 결정을 내린 사람입니다. ‘원래’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통용되고 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다못해 우주라는 공간에 지구가 생겨나고 공룡이 살던 곳에 공룡이 멸종한 이후 사람이 생겨나고 진화하면서 기술의 발전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원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존재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모호해집니다. 그런 논리를 펼친다면 어머님의 뱃속에서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원래’가 맞습니다. 사람은 원래 이목구비를 가지고 태어나고 원래부터 당신을 사랑해주는 부모님의 밑에서 자라왔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며 조직에서 또는 집에서 물건을 정해진 장소에 두어야 한다거나 아니면 행동 규정 혹은 복장 규정이 정해진 곳이 있다고 신입사원이 해당 사항을 모르고 실수를 저질렀을 때 원래가 아니라 정해진 규율이기에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회의 법과 질서 규정도 모두 다 원래 어디선가 갑자기 창조된 게 아니라 누군가의 머리를 통해 지식을 집대성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헌법이 존재합니다. 기록이 남아 있는 역사에서 찾아본다면 조선시대 세조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이르러서야 완성한 경국대전이 조선시대 최초의 법전입니다. 이 역시도 당시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사회를 평안하게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 낸 규정이고 규범이지 갑자기 외계인이 툭 하고 던져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쉽게 ‘원래’라는 단어를 사용해 상대방을 죄인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까지만 ‘원래’이며 원래 지금 하는 일을 무조건 해야 하고 원래 이렇게 살아야 하고 원래 지금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하며 원래 모두의 삶이 정해진 대로만 흘러간다면 우리는 지금 살아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원래’에 의해 정해진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면 굳이 심오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하는지 생각할 필요 자체가 없습니다. 그저 정해진 규율에 따라 살고 원래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살다가 죽는다면 무슨 고민이 더 필요할까요?
사주팔자도 미신임과 동시에 인간이 생겨났고 인류 최초의 직업 3가지는 스파이, 매춘부, 무당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미래의 일을 먼 옛날부터 아주 궁금해했고 무당(혹은 교주)의 말이 곧 법이고 실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으며 권력도 엄청났다고 합니다. 현대에도 사주팔자나 타로 아니면 신점을 보러 다니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입니다. 돈을 소비해서라도 미래를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100% 예언에 성공하는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언가로 엄청나게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도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합니다. 그 말은 우리는 운명을 바꿀 힘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주팔자 혹은 신점을 본 뒤 모든 미래가 말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운명을 개척할 힘을 가지고 있고 운명에 대항할 의지와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잠재력을 깨울 수 있는 능력을 깨우치지 못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몸속의 비암호화 DNA(사용하지 못한 체내의 DNA)를 90% 넘게 남겨두고 생을 마무리한다고 합니다. 물론 세상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잠재력을 깨우면 무조건 해낼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과 똑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가며 다른 흐름의 인생을 살고 싶다면 잠자고 있는 비암호화 DNA를 깨우는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찾고자 하는 현실의 그림을 마음속에서 찾아내고 고양된 감정과 결합한다면 어둡기만 했던 세상이 점점 밝아짐을 느끼게 됩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만 가득했던 먼지투성이의 당신의 두 발아래 꽃과 평탄한 길이 눈앞에 보일 것이고 저 멀리 지평선에는 당신을 반기는 무지개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곳이 진정한 파라다이스입니다. 누구나가 다 각기 다른 DNA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다른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길을 따라서 똑같이 가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옳거나 그름의 판가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곳으로 두 발로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됩니다.
자, 이제 마음이 정하는 방향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셨나요?
준비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준비되었다면 실천하세요.
행동은 꾸준함이 되고 꾸준함은 습관이 되어 원하는 파라다이스에 데려다 놓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