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건 오직 '사람'뿐
중국에 매우 유명한 사자성어가 있다. 물시인비(物是人非) 직역하면 사물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달라졌다는 말이 되고 의역하면 세상은 변함이 없지만 사람은 변한다는 뜻이다. 가까운 예로 아주 오래된 친구를 10년 만에 만난다면 서로는 서로의 변한 부분을 인식할 것이다. 예전의 모습도 남아있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변한 모습에 집중하고 반가워하며 신기해한다.
과거로부터 인류는 끝없이 변화해 왔다. 환경이 변함에 따라 인간이 변화했다기보다 더 나은 환경을 인류는 끝없이 갈망해 왔고 그에 대한 결과로 환경에 맞게 진화하였으며 과학 기술력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 증거조차 남아있지 않은 아주 먼 과거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종 이전에도 인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현재 세상에 나와있는 화석 증거들로 보았을 때 인류는 모두가 흑인이었고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피부색깔도 머리카락도 생김새도 달라졌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현명한 사람)이다. 과거의 인류조상들부터 그래왔으며 현재도 마찬가지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그로 인해 긍정적인 기술의 발전도 엄청나게 이루었지만 반면에 욕심이 과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고 빼앗으려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기억도 못하는 어린 시절에 엄마, 아빠를 찾았고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히면서 자라왔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공부도 하고 기술도 익히고 체력도 기르면서 다가올 미래에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조금 세속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결국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다. 오늘의 내가 돈이 있다고 해서 내일도 있으리란 법은 없다. 오늘은 남의 물건이 탐나지 않았었는데 내일의 나는 돈이 없다면 남의 물건을 탐하려는 부정적인 마음이 촉수처럼 뻗친다. 그렇지 않은 척하더라도 마음속에서는 온갖 갈등을 겪는다. 남의 것을 탐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조금이라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싸운다. 늘 가진 것에 만족하기 어려워하고 목표를 이루었음에도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나쁘다고 하기엔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이런 마음이 꼭 부정적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부분으로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자신에게 동기부여하고 잠도 줄이고 남들보다 훨씬 더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끝없는 경쟁의 사회에서 살면서도 끝임 없이 사람들끼리 유대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사람의 마음과 외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가지만 사물은 변하지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이다. 자연도 모두가 살아 숨 쉰다. 사람만이 살아 숨 쉬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에 의해 자연은 변화된다. 나무는 베어지고, 사람의 윤택한 삶을 위한 에너지 자원인 석유, 석탄으로 인해 대기가 뜨거워지고, 빙하가 녹는다. 유빙을 타고 생명을 보존하는 북극곰에게는 사람들의 욕심이 집을 잃은 것도 모자라 먹을 식량을 구할 수 없어 당장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모두 태어나서 자라고 언젠가는 죽는다. 1968년 아폴로 8호가 달의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지구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우리는 그곳에 모두가 모여서 살고 있다. 지구가 파괴된다면 모두 한순간에 없어질 운명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사람은 당장 눈앞의 편안함을 추구하고 더 편안한 환경을 조성하려 골몰하며 자연에서 얻어진 자원은 무한인 것처럼 여긴다.
기술이 발전해 온 만큼 자연은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사실 알고 보면 자연이 변화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의해 변화하게 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한 생활을 전부 다 포기하고 자연인처럼 살아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구에 같이 사는 식구라고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아껴주고자 하는 생각들이 하나 둘 모인다면 지금처럼 빠른 시간에 변화해 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지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작 3초 정도 살아가는 인간이 이렇게까지 아등바등 살아갈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까?
비단 환경의 문제만도 아니다. 사람이 변함으로써 분열과 갈등이 생긴다. 어쩌면 궁극적으로 바라는 모습은 다 같이 잘 살아가자는 하나의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이루고자 하는 과정이 다르다. 공산주의라고 해서 꼭 나쁜 것은 아니고 민주주의라고 해서 꼭 전부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두 체제도 사람의 생각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변화해서 발현되고 있다. 세계의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인정받고 장점이 많은 체제는 민주주의인데 그럼에도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국가가 있다. 그들은 과연 모두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확실한지 겉으로는 그런 척을 하면서 특정한 사람들이 사는 동안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제삼자인 우리의 입장에서야 장, 단점을 쉽게 알 수 있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판단하기 굉장히 아리송한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서 내가 건물주가 되어 임대를 내주었던 상점이 있는데 법적 근거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퇴거를 권고하였으나 세입자는 생활고를 이유로 퇴거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누가 더 이기적이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황만 놓고 보면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세입자가 나가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 건물주가 법적 근거를 위반해 계약기간 내에 퇴거를 권고한 게 아님에도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나가지 못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이다. 다만 세입자의 입장에서 병에 걸려 누워있는 아내를 돌보기 위하여 가게를 꼭 운영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감정적인 이유가 될 수 있기에 그래도 건물주가 옳은 건 맞지만 피치 못할 상황에 의해 간곡히 부탁을 하는 상황이라면 상대방에게 처음에는 이해를 바라면서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곧 감정적 싸움으로 번져 서로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마음을 가진다. 그 마음은 각자의 자녀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부모의 원수는 자녀들에게도 원수가 되듯이 무조건 법대로 집행하며 융통성이 전혀 없는 빡빡한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싶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고 우물에서 꺼내주었더니 봇짐 내놓으라 하는 상황도 살다 보면 많이 보기도 하고 겪기도 한다. 욕심에서 비롯된 상황도 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기 마련이다. 이렇듯 사람은 언제나 빠르게 변화해 왔다. 진짜 아이러니한 건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둔다 한들 내가 직접 누리는 것은 불과 길어봐야 50년 언저리다. 사람으로 태어나 늙지 않을 수 없고 병들지 않을 수 없고 죽지 않을 방법 같은 건 없고 500년 1000년을 살지 못하면서도 살아가는 동안 편안함과 안정감을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기에 아마 이 지구가 끝장나는 그날까지 우리의 후손을 통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나는 마르틴 루터의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나 하나쯤은’ 같은 이기적인 마음 말고 ‘나 하나부터’라는 긍정적이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려 노력할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완벽할 수 없을지라도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물감처럼 주변 사람들이 물들고 그 주변의 주변이 점차 물들어가며 모두가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연대하고 사랑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결론을 즉,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면 좋겠다.
Get Lost
우리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찾았고
우리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깨달았고
우리는 길을 잃어봤기 때문에 또다시 길을 찾을걸 알고 있다.
평탄하고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고속도로 같은 길이 있다면 모두가 그 길을 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모두의 길이 다르단 걸 알기에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고 경계하며 현실에 입각해 사고를 대비하여 보험을 들어둔다. 모든 안전장치는 If 만약에 라는 조건이 먼저 붙는다. 그러니 절대 두려워하지 말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두 눈 딱 감고 내 두 발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가 가로막힌 길이 있으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되고 때론 근처에 걷는 사람이 있다면 길을 물어가며 걷기도 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느샌가 또다시 평탄한 길을 걷고 지나온 장애물은 장애물이라 생각지도 않게 될 것이다. 어차피 가고자 한다면 무엇이 나올지 노심초사하기보다는 눈앞에 위험이 들이닥쳤을 때 심호흡을 하고 새로이 보이는 길을 찾아가는 평점심을 유지하면 된다.
옛말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움을 가지면 호랑이의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을 것이다. 자신의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났어도 그 호랑이가 무서운 호랑이 일지 사람을 좋아하는 호랑이 일지 모르는 일이다. 평정심을 가지고 심호흡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관계 속에 이미 살면서 호랑이를 수 없이 만나봤던 사냥꾼도 있을 것이고, 호랑이 전문 사육사도 있을 수 있으니 기꺼이 도움을 받고 나도 나중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돌려주면 된다. 도움을 청하기 어렵거나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다면 새로운 경험자가 될 첫 번째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위험을 호랑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에 비하면 우리 사람들은 모두 타노스다. 호랑이 정도는 손가락만 까딱하면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간과하며 살아왔고 자신의 잠재력을 뽐낼 기회를 찾지 못했다. 위기가 왔을 때 비로소 생각보다 '나'라는 사람이 강하다는 걸 알 수 있고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이 된다. 이렇듯 자신의 길을 잃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말고 멈추지 않고 한 발 내딛기가 죽을 만큼 무섭고 두렵다면 걸어왔던 길을 잠시 쳐다보며 걸어도 좋다. 우리에게 생기는 사건사고들은 잘 바라보면 속도위반 카메라나 다름이 없다. 내가 너무 빨랐기에 잠시 속도를 줄여 천천히 가도 된다는 알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럴 때 잠시 쉬어가도 좋다.
우리는 길을 잃었었다. 앞으로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우리는 절대 지쳐 쓰러져 버리진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길을 반드시 찾아내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