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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꿈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

by 정수윤세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 글의 시작은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부모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은 언제나 곁에 있는 부모님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내편이 되어줄 것을 알기에 막대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건 각자 가정의 사정이나 분위기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님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혼을 하셨다. 어머니의 바람을 아버지가 알고 난 이후 처음엔 용서했어도 두 번의 용서는 없었기에 이혼을 선택하셨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내가 21살이 되어 군 입대하던 때까지도 연락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었다. 내가 입대를 하고 자대 전입을 받던 날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고 법적으로 남편이 없던 탓에 유일한 자녀인 내가 상주가 되어 장례식을 치렀다.

그래서인지 사실 다른 사람들은 '엄마'라는 단어가 어떤 단어보다 친숙하게 느껴지고 따뜻하게 느껴진다고 한다면 나는 아니다. 엄마라는 단어는 정말 어색하고 오히려 아빠가 나에게는 그런 따스함이 느껴지는 단어다.

부모님의 이혼 후 많이 힘들어하셨다. 다니던 직장에서도 그만두시고 고향으로 내려와 나를 할머니의 손에 맡기고 일만 하셨다. 주로 운전을 업으로 삼으셨는데 다니던 직장도 고속버스 회사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덤프트럭을 운전하셨다. 열심히 번 돈은 할머니께 보내져 나에게로 돌아왔었다.

그렇게 오직 일만, 나만 생각하며 의지하시고 인생을 보내신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는 내가 성인이 되던 해부터 내가 안정적인 가정을 갖기를 원하셨다. 더불어서 자식이 생기면 자신에겐 손자, 손녀가 생기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항상 하셨고 그 말을 하실 때면 항상 웃으셨다.

기대에 힘입어 28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1년 만에 이혼을 했다.

처가살이를 하면서 하고 싶을 일을 모두 간접적으로 통제받았다. 특히 직업에 대한 선택이 그랬다.

나의 인생을 이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께는 너무 죄송하지만 같은 선택을 했다.

아버지께 이혼 결심을 알리던 때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눈으로는 놀라셨지만 입으로는 괜찮다고 아들을 믿는다고 말해주시던 그 참담한 표정...

어떤 마음을 갖고 계셨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버지와 나는 목 뒤 2개와 와 옆구리에 같은 위치에 점이 있다. 어릴 때부터 그걸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말하고 다니셨었다. 외모는 엄마와 많이 닮아 아빠의 아들이 아닌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하나의 증거였다.

그런 아들이 닮을 게 없어서 이혼까지 닮아있다고 생각하실 것 같았다.


이혼 후 급격한 심경의 변화로 세상을 사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잃었었다. 이미 인생이 그곳에서 종료가 되었고 숨은 쉬고 있지만 끊어지는 것도 한순간에 결정될 운명처럼 느껴졌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아무리 해봐도 어떻게 죽든지 그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포기하지 않고 키워주신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마치 내 허리에 감긴 줄처럼 느껴졌다. 그날부터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거나 그런 생각이 들면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시의 다짐은 이랬다.

‘그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 장례를 치르고 나도 따라가자 더도 덜도 말고 그때까지만 살아보자’


사실상 인생의 목표였다.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내 직업도, 꿈도, 미래도, 하고 싶은 일도 남들은 다 갖고 있다는 버킷리스트조차도 단 한 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은 하기는 했지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루고자 하는 것이 없었으니 모으지도 않았다.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생각이 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유흥이나 도박 같은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었다. 어디 가서 자랑은 하지 못할 하나뿐인 아들이 사고 치는 모습까지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나를 가두었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최소한으로 친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집 앞까지 찾아와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나를 가두며 살다가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정말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을 배려하는 내 무의식이 그녀에게는 호감처럼 비추어졌고 그렇게 이혼 후 연애를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나를 가두고 사는 사람이면서 대인관계도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이 연인과의 관계를 오래 이끌어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름 내 방식대로 돈과 시간을 써가며 연애에 임했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연애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전부라고 여겼고 점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외부 데이트를 하긴 하되 식사와 카페 정도였고 1~2달에 한 번 정도 여행이라고 부를 만한 거리의 데이트를 즐기긴 했지만 주로 만남은 실내였다. 워낙 혼자만의 시간을 오래 보내니 조용하고 둘만 있는 공간이 편하게 느껴졌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아주 이기적인 마음이란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다. 이별 후에도 나는 내 잘못이 더 적다고 여겼었다. 상대가 내가 가진 것보다 바라는 게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이별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자각이 피부에 닿기 시작할 때는 더 비참함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살까 싶었고 그러니 혼자 살면 되는 건데 왜 굳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가며 사는지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변하며 나를 괴롭혔다. 이제 완전히 상황은 바뀌어서 귀책은 내가 100%를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 그 어떤 누구도, 그 어떤 단 한 사람도 내게 ‘넌 실패자야’ 라거나 ‘넌 굳이 숨 쉬면서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야’라고 말한 적이 없음에도 내가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내면에 쌓인 분노를 나에게 풀었다.

그때 운명의 이정표가 다가왔다. 내가 실질적으로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던 사람들이 나를 더 살게 했고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실제로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가수 한 분이 계시고,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던 동생 2명이 있고, 모임에서 만났는데 모임은 해체됐어도 아직도 연락하는 결이 비슷한 1명의 동생이 있다. 가수분은 노래와 책으로 인생의 잘못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다 내 탓만이 아니라며 위로해 주었다. 같이 일하던 동생들은 틈만 나면 같이 집에 찾아와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납치 아닌 납치로 세상 구경을 이리저리 시켜주며 내 시야의 환기를 도왔다. 마지막으로 대화가 통하는 단 한 사람의 동생은 이성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무엇을 하든 그게 옳은 선택이었음을 믿고 지지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에너지를 북돋아주자 나도 점차 살아났다.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생기를 띄고 있는 에너지는 주변을 모두 변하게 만들었다. 긍정의 눈에는 긍정만 보였다. 흔히 접하는 유튜브에서 조차 구글은 마음까지 읽었는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드는 영상들을 추천해 주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받은 에너지를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른 결론이 나도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에너지를 불어넣어 다시 일으키고 싶었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적절한 위로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받았던 그들에게도 똑같이 마음을 묻고 대화를 통해 한번 더 우리가 하나로 결속되어 있음을 확인했고 나의 이 재능이 어쩌면 지금 나와는 관계없는 누군가에게도 힘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너무 오랫동안 방황의 세월을 거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헤쳐 나와 이제 알을 깨고 나온 한 사람이 꿈이 생기고 버킷리스트가 생겼고 목표가 생겼다.


그러다 문득 아차 싶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궁금해하면서 가장 큰 도움을 받고 은혜를 받았던 아버지의 마음을 물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깨달음이 일자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도 분명히 꿈이 있었을 건데 나라는 사람을 지켜내려 키워내려 애쓰느라 다 포기했을 아버지가 있었는데 정작 하나뿐인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작년에 환갑을 맞이하신 아버지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은 게 유일했고 같이 여행도 가본 적 없었다.

더불어 상상력이 뛰어난 N의 성향은 아버지가 떠나는 날을 상상하게 했다. 그날 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아들이라서 감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기회가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당장 하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반갑게 받아 주시며 요즘 들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내가 어릴 때의 꿈을 자주 꾸셔서 전화할지 고민하셨다고 했다. 평소 1~2주에 한 번 정도 전화하는 아들이 대뜸 전화해서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하고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니 조금 놀라신 듯했다. 만나서도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아버지께 웃으며 아니라고 답하면서도 참 나는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가만히 마음을 물었다. 어떻게 사셨는지, 엄마는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내가 없던 젊은 날의 아버지는 어떻게 살았는지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줄도 몰랐다. 아버지는 지금 같이 사시는 분이 계셔서 둘만의 외식 자리도 오랜만이었다. 말씀을 듣는 내내 아버지도 내 아버지이기 이전에 평범한 한 남자라는 사실도 알았다. 시간상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도 또 하기로 하고 아버지를 모셔다 드리며 아버지의 꿈이 있으셨는지 물었다. “있었지”라고 말씀하시며 멋쩍게 웃으시는 담담한 목소리에 무엇 때문인지 눈물이 차올랐다. 가수도 하고 싶었고 어떤 회사의 사장도 하고 싶으셨다고 했다. 실제로 아버지는 나훈아 노래를 좋아하고 객관적으로 들어도 수준급의 실력이 있으셨는데 아버지의 꿈도 있었는데 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치셨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내 나이쯤이 되어 부모님을 뵈러 가는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요즘 아버지를 뵐 때면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진다. 태산 같던 어깨는 어느새 나보다 작게 느껴지고 피부에는 검버섯이 생기고 머리숱도 예전과 다르게 비어있고 얼굴과 손에 주름진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아리다.

아버지는 늘 어릴 때 더 잘해주지 못해서 더 가르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오히려 반대다. 그만큼 해주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지 못함에 죄송할 뿐이다.


가끔 부모가 해준 게 없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여러 생각이 든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뉴스나 인터넷에서 가끔 부모가 자식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모두가 나와 같은 감정이라고 일반화할 수 없다.

다만 나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결혼할 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는 부모님을 욕하는 사람들을 볼 때 철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귀를 닫는다. 그다음 말은 안 듣느니만 못한 말일 테니까


나의 아버지도 내 결혼 때 해주신 건 없다. 그러나 결단코 단 한순간도 원망이라는 감정을 품어본 적이 없다. 이만큼 키워주셨음에도 감사하고 잘 생각해 보면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함에 있어서 아버지께 말씀을 드릴 때면 반대하거나 반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렇게 나를 믿어주셨던 아버지는 지금도 나를 믿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남들이 자신의 부모를 깎아내리며 하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내 아버지가 정말 대단한 사람인 걸 다시금 깨닫는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해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을 뿐이다.


심규선 님의 신이 그를 사랑해라는 곡의 가사엔 이런 내용이 있다.


신이 그를 사랑해 나를 만드셨대요 그가 혼자 외롭게 두지 않으시려고요

신이 나를 사랑해 그를 만드셨대요 내가 혼자 울도록 두지 않으시려고요


내게 주어진 오늘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 사람이 가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라는 존재를 언제나 사랑으로 지켜봐 주시고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오직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꿈은 앞을 향해 있지만, 아버지의 꿈은 이제는 나를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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