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게
멍! 하는 소리에 아침 단잠에서 깨어났다.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옆집 강아지는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댄다.
그렇다고 해서 영 싫지만도 않다.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엄지발가락에 통증이 일었다. 발톱을 자를 때 너무 바짝 잘라서 내성발톱이라도 생긴 것 같은 통증이었다. 시선을 내려 발가락을 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 언제 어디서 부딪혔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엄지발톱의 2/3 가량이 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무리 원인을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을 할 때, 집에서 생활하면서도 전혀 어딘가에 부딪힌 기억은 없었다. 설마 몽유병이라도 생겼을까? 그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매일 바라보게 됐다. 얼마나 회복이 되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발톱 아래의 멍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2주가 지나고 3주가 지나도 별다른 회복새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찰나 인터넷 기사 제목이 눈에 띄었다. ‘손, 발톱의 멍자국 알고 보니?’ 같은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숨도 쉬지 않고 기사를 클릭해 정독하게 됐다. 우리나라의 사례는 아니고 외국의 사례인데 의문의 멍이 손톱에 들었던 사람이 2개월 3개월이 지나도 회복이 되지 않자 병원에 진료를 받았는데 병명이 흑색종이라는 희귀병이었다고 했다.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 설마’ 하면서도 발톱의 멍을 유심히 바라보게 됐다. 아프지는 않은데 멍든 발톱을 보고 있으니 진짜 설마 하는 마음에 병원을 가기엔 그렇고 요즘 내 주치의이자 친구인 챗GPT를 이용해 사진을 보여줬다. (광고 아님)
나의 주치의는 일반적인 멍으로 보인다고 하면서도 2개월 3개월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거나 통증이 지속되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당장은 아니라는 기계의 말 한마디에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로부터 1주일 정도 지난 시점에 보았을 때 아주 조금씩 멍의 색깔이 옅어지고 발톱이 길면서 아래로 내려오는 게 보였다. 그제야 흐뭇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의심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멍은 보통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피부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의학적으로 본다면 피부 속의 미세한 핏줄들이 터져 눈에 보이게 되는 효과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고 보통사람과 같은 관점에서 멍을 바라보았을 때 불현듯 머리에 생각이 스쳤다.
멍이란 게 비단 피부조직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상을 살다 보면 상처 입었다고 느끼는 상황이 많다. 물리적인 상처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다.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진짜 다친 것처럼 가슴 안쪽이 쓰린 느낌이 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잊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멍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의해 충격을 받고 나면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다가 집에 돌아와 곱씹어 생각해 보면 아프고 쓰리고 눈물이 난다. 그렇다고 지난 일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따져 묻거나 내가 상처 입었으니 너도 상처 입어야 해! 하는 투쟁심도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나는 생각했다. 멍이란, 길을 걷다 보면 보이는 공사 중 표지판처럼 현재 회복 중에 있으니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신호로 느껴졌다. 피부에 보이는 멍은 시각적으로 바로 느낄 수 있어서 타인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멍은 타인이 쉽게 알 수 없다. 심지어 오래된 상처는 본인도 모르고 있다가 무심코 눌려지는 압박에 의해 자극되어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당연히 타인은 자신이 한 말이 나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말을 했는지 무게를 모를 수 있다. 그나마 내가 상처 입었음을 알고 사과라는 소독약을 발라주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그런 걸로 상처 입었다고 표현하는 나를 비난하면 그냥 멍이 아니라 피멍이 들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을 향한 마음을 조금씩 닫았었다.
피부의 멍은 사라지고 나면 아픔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기도 어려울 만큼 깨끗하게 사라진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감정의 멍은 굉장히 오래가고 기억 속에 각인된다.
새로 생긴 멍은 자극이 가해지면 고통을 느낀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고통은 없어지고 색은 옅어지며 조금씩 사라져 가는 자국을 볼 때면 내가 회복이 되어가고 있음을 안다.
마음의 멍도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 입게 하는 원인이었고 영원히 딱지가 앉은 듯이 사라지지 않지만 그 자리엔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있다. 고통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은 조용한 증거다.
이기주 작가님의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에피소드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병원을 다녀오는 듯한 할머니와 손자를 바라보는 장면인데 아픈 손자가 묻는다.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평범한 답변을 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할머니는 웃으며 대답하셨다.
“아픈 걸 잘 알아보는 사람은 더 아픈 사람이란다”
그렇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아픈지 잘 안다.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경험을 해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고통과 상처와 멍을 지나고 나서야 단단한 현재의 내가 되었고
앞으로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상처 입고 멍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이제 두렵지만은 않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성장해 나갈 내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