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
운전하고 시내를 지나다 문득 신호에 걸려 주변을 돌아보던 때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인 그리고 신비로운 광경을 보게 됐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 할머니 댁에서 같이 살게 되었었는데, 할머니는 항상 아침 해가 뜰 무렵 밭에 나가 파, 열무, 생강, 시금치 등 제철이 되면 자라나는 채소를 길러 수확한 뒤 시장에 직접 나가 판매하시곤 했다. 잠에서 깼을 때 자리에 할머니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밭으로 나갔고 언제나 할머니는 그곳에 계셨다. 시장까지는 시내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수확량이 많을 때면 할머니 머리에 이고 가는 게 제한적이어서 리어카를 끌어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짐을 올려드리곤 나는 빈 리어카를 끌고 신나게 집으로 돌아와 자유시간을 즐기곤 했다.
할머니는 돌아오는 시간도 같은 항상 같은 버스여서 그 시간이 되면 또다시 리어카를 끌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짐이 있다면 실어서 집으로 가져가기 편했고 없어도 어린 마음에 리어카 운전은 어떤 놀이보다 흥미롭고 재밌었다.
학교가 쉬는 날 아주 가끔은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같이 가곤 했는데 항상 어느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보따리를 펼쳐 노끈으로 묶어놓은 야채들을 판매하셨다. 그땐 그저 빨리 팔리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어서 학종이를 가져가 학을 접어 야채더미에 살포시 올려놓곤 했다. 할머니는 쓸데없는 짓이라며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또 아주 가끔은 그런 아이의 행동을 귀여워서 눈길을 주는 어른들이 계셨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배달이라거나, 대형마트라거나,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다 시장에 직접 방문해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사가는 시장경제 시대였다.
하나 아이러니 한 점이 있다면 그때의 기억에도 시장에는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이 드신 어르신분들이 훨씬 많았다. 여기저기 흥정을 하는 모습,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모습, 정에 못 이겨 서비스라며 무엇 하나라도 더 검은 봉투에 넣어주던 모습, 잔돈은 됐다며 서로 돈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실랑이를 하는 모습 모두 다 어른들의 세상으로 보였다. 워낙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왜곡된 기억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휴대폰 클릭 한 번에 집 앞에 필요한 물건이 도착하는 시대다. 그런 환경 변화에 따라 시장을 방문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이 줄었고 예전보다 점포도 많이 줄었다는 기사를 접한 적도 있다. 사실 나부터도 시장은 정말 1년에 1번 또는 2번 갈까 말까 하는 곳이다.
물론 수도권이나 대표 관광지의 몇몇 시장들은 젊은 세대나 외국인들의 방문이 잦은 곳도 있지만 지방의 시장 같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지역의 어르신들이 언제나 방문하셔서 그때와 비슷한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 현재의 재래시장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시장의 모습은 약 30년 전인데, 그렇다면 지금 시장에 방문하시는 어르신들은 30살이 젊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분들은 그때부터 시장에 방문하셨던 걸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디지털 시대에 발을 맞추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시장에 방문하시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재래시장에는 다수의 어르신이 주 고객으로 계신다. 미래의 일은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30년 후에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다. 그때가 되면 나도 대형 마트보다는 시장으로 가서 사람들의 정을 느끼고 싶어 질까?
시장에 방문하는 이유는 각기 다를 것이다. 주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러 가시기도 하지만 그저 매일 사람 구경과 물건을 구경하며 세상이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려 방문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서, 대화가 그리워서, 정이 그리워서...
30대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것도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지만, 그때를 추억하는 이유는 향수에 젖어들고 싶어서다. 어릴 때 할머니가 해주시던 깨죽이 그리워 아무리 찾아봐도 그 맛을 재현하는 집은 없다. 음식뿐만 아니라 냄새, 분위기, 사람들의 모습 모두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나마 변하지 않는 곳이 시장이 아닐까? 그래서 더 나이가 들면 고향의 향수처럼 예전 모습이 그리워 찾아가게 되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정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정치인들이 항상 선거철이 되면 평소엔 절대 보지도 않던 시장에 방문해 상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많이 포착된다. 아니 어쩌면 필수코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유 역시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수단이라고 보여진다.
누군가에겐 생계이고 평생을 함께한 시장이 누군가에겐 4년마다 한 번 방문해 악수하는 장소가 되는 셈이다.
나조차 시장을 자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시장을 자주 방문합시다!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아주 가끔 가까운 시장에 들러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 바쁘게만 살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느낌을 선물 받게 될 거라 생각한다.
재래시장의 상인분들, 주 고객이신 어르신분들은 모두 우리네 부모님이고, 친구의, 지인의 부모님이다. 우리는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가족들도 저마다의 환경에서 때론 치열하게, 때론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30년 전의 젊은이들이 어느새 나이가 들어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그들은 과거의 ‘나’였고, 지금의 ‘나’이고, 미래의 ‘나’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