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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도는 억겁의 인생

빙빙 돌아가는

by 정수윤세

어느 날엔가부터 갑자기 운명이 주는 깨달음의 순간을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애써 아팠던 과거를 돌아보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던 날들이 비처럼 마음에 쏟아져 내렸고 시내가 되어 흘렀다. 내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동안에도 마음의 장마는 계속됐다. 비는 내렸고 시내가 되어 한 곳에 모여 응어리지듯 웅덩이가 되었다가 다시 기체로 증발했다가 하늘에 모여 다시 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내가 알아볼 때까지 말이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으며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 그 위에 떠 있는 종이배처럼 살다 죽으면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회피형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기억을 굳이 들추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증발되고 내리길 반복했던 빗물도 언젠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중으로 다 흩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예상은 착각이었다. 굳이 과거를 들추지 않아도 내리는 빗물은 내 옷을 적시고 몸을 적셔서 피부에 닿아 절대로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무대응이 최선의 대응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인생은 돌고 도는 억겁의 수레바퀴 속에 있다. 인간은 인생을 다람쥐 쳇바퀴처럼 느껴서인지 운명이 제시하는 수레바퀴에 탑승하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나 또한 그랬다. 친구들과 사람들의 연대가 멀어질수록 오히려 내가 특별하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남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특별한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도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가장 큰 모순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특별한 인생을 사는 어떤 존재는 영적인 영역의 특수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회에서 성공한 직업을 가진 혹은 돈을 많이 번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나의 겉모습만을 보고 칭찬하고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허나 진짜 원하는 참된 인간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소통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나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따뜻한 마음을 원했다. 그건 연민이나 연대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신이 보낸 특별한 존재라고 해도 연대가 없으면 현실로 나타나지 않을 일이었다.


군 전역 후에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그저 게임을 좋아해서 게임을 했고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그게 인생의 낙이자 전부였다. 일은 하기는 했는데 택배 배송도 하고, 식당 아르바이트도, 마트 보안사원도, 고급 아파트의 보안요원으로도, 여행사에서 학생 단체를 데리고 수학여행을 가기도, 공장의 생산직으로, 물류직으로, 아웃소싱의 관리자로, 보험사와 통신사의 상담사로 정말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그 말은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정착하지 못하는 삶은 종이배처럼 둥둥 떠다녔다. 목적지도 없었고 물이 흐르는 데로만 갔다. 아웃소싱 관리자를 할 때 여자친구를 한 명 사귀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내가 하던 게임에서 만난 온라인 친구였다. 온라인으로 알고 지낸 세월이 6년 정도 되었었고 어쩌다 보니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되어 속전속결로 연인이 되었고 장거리였음에도 2년 정도의 연애 기간 동안 큰 다툼 없이 지냈다. 운명은 떠돌이로 지내던 내 인생에 이정표가 되어줄 것처럼 그녀를 내 아내로 만들었다. 결혼도 속전속결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불편했다. 어른들의 권고로 진행하긴 했지만 모아둔 돈은 전혀 없었고 재산도, 차도, 집도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서 도움을 주거나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이 살면서 모으고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그렇게 사는 것이 결혼 생활이라는 말에 혹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결혼식에 내가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조차 꿈처럼 느껴졌다. 달콤한 꿈이 아니라 이게 현실이 맞는지 아닌지도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괴리감은 현실에서도 나타났다. 연애 동안에는 다툼이 없던 우리에게도 결혼이라는 현실은 조금씩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직업도 또 바꾸었다. 원하던 일은 배송직을 하면서 열심히 하면 몸은 조금 힘들더라도 돈은 많이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말을 꺼냈으나 상대방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가족보다 타인들의 눈을 신경 쓰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외적으로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일을 원했고 완전 내키지 않아도 나만 잘하면 돈을 벌 수 있는 보험설계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열정이 있어서인지 나름 잘되었다. 직장생활 한 달 동안 해야 벌 수 있는 돈을 1주 2주 만에 벌어들이니 재미도 있었다. 극내향적인 사람인데 외향적으로 보이려 노력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영업직이라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위해 모임에도 들어가고 블로그도 운영하고 SNS도 운영했다. 처음에 잘되던 영업은 점차 시간만 흘러갔고 그나마 남아있던 몇 없던 지인들도 떠나갔다.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히니 집안 사정도 좋을 리 만무했다. 끝내 이혼을 결심했고 상대방의 어머님은 당연히 반대했다. 당신의 딸이 이혼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었다. 한 번은 아이가 생겼다가 6주 만에 유산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어서 당시 아내의 옆에서 자리만 지켜주고 토닥여주기만 했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어머님은 사촌 언니가 그러더라며 평소에 몸 건강 관리 좀 하지 그랬냐며 걱정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로 상처를 주고 말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혼까지 하고 나니 물에 떠다니던 종이배는 이제 배의 모습도 아닌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의욕도 없던 때에 그나마 위안이 되어준 건 설계사를 하며 모임 안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매일 연락을 주고받던 이성의 친구가 있었다.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어서 대화가 잘 통했고 서로의 어려운 점이 있을 때 공감과 이해로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던 친구였다. 내가 이혼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도 혹시 본인 때문에 그런 건 아니냐며 미안해할 정도였다. 두 번째로는 같은 동네에 살던 2살 위의 누나가 한 명 있었다. 누나는 외적으로는 나의 이상형에 가까웠지만 돌싱의 입장에서도 그랬고 딱히 이성과의 애정전선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단 한마디의 말을 해주기 전까지는 그랬다. 평소에 모임에서 보이던 내 모습이 보이지 않고 힘들어하는 모습에 그저 진짜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위로의 한마디가 나에겐 사랑으로 비쳤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의 2주간의 적극적인 구애에 반응이 없어 포기했었는데 다시 일주일 만에 연락이 오게 되어 연인의 관계가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친하게 지내던 이성인 친구와 누나와 나는 셋 다 같은 동네에 살기도 했고 결도 맞고 대화도 잘 통하는 편이어서 친하게 지냈었다. 같이 놀러도 다니고 자주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일도 많았다. 누나와 내가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그 친구에게도 숨겼다. 이유는 모임은 워낙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내 신분이 돌싱이라는 점도 적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다. 평소 연인처럼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다른 모임의 사람에 의해서 사진이 찍혀 발각되었고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 친구는 강제로 알게 되었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해 보였다. 내게는 ‘배신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매일 연락하던 친구였음에도 점차 연락이 뜸해졌다. 그러나 연인은 연인이고 친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이건 내 욕심뿐만이 아니라 누나도 역시 우리의 관계를 알기에 계속 친구로 지내는 것을 이해했고 오히려 더 권유해 주었다.

다만 배신감이라는 키워드로 봤을 때 누나의 입장에서는 친구가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했으니 나오는 단어와 반응 같다고 했고 나는 전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아무튼 당시 여자친구의 허락이 있었으니 적극적인 연락으로 마음을 어느 정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여자의 마음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셋이는 다시는 만나기 싫다고 했다. 그래서 누나를 빼고 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응어리를 풀었음에도 누나와는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힘들게 관계를 조금이라도 회복시켜둔 것이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친구라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많았고 그 친구의 고민거리를 들어주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임에서 누나와 나의 연인 관계를 의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내가 돌싱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연인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파문이었다. 운영진은 내가 바람을 피웠고 그것이 직접적인 이혼의 사유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은 모임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명분만 내세웠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기에 나는 모임을 자진해서 탈퇴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또 누나도 거의 강제로 몰아냈고 그다음은 친구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그때 나의 선택이 그 친구와의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선택을 맞이하게 했다.


모임의 운영진은 같이 친하게 지내던 셋의 관계가 있었으니 그 친구도 분명히 우리의 관계를 미리 알고 있었을 거라 판단했고 거기에 대해 친구에게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모임을 친구는 이미 나간 나지만 그 친구는 모르고 있었다는 직접적인 해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모임에 대한 반감도 있었을뿐더러 이미 모임을 나왔고 당시 여자 친구도 쫓겨난 마당에 연인을 지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친구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면 누나는 오히려 그 친구와 나와의 관계를 의심할 거라 생각했기에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하라는 말로 상처를 줬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듯이 경솔한 내 발언에 상처받았을 친구에게 여러 번 그리고 지속적으로 연락을 했으나 전혀 받아주지 않았다. 처음 받았던 상처도 아물기 전에 다시 받아버린 치명적인 상처는 우리의 친구 관계를 되돌리지 못했다.


누나와도 2년 정도 연애를 하다가 결국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나는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는데 누나는 나이가 점점 들어감에 따라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과거에 결혼을 하기로 했던 당시의 생각이 떠올라 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서로의 길을 응원해 주기로 하고 다툼이 없이 좋게 헤어졌다. 나도 바보 같은 사람이라서 그런 일을 겪고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드니 고민 상담을 주로 하던 그 친구가 다시 떠올랐다. 오히려 그 친구와 결혼한다면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었다.


그로부터 6년 정도가 지나고 새로운 여자 친구를 다른 동네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여겨서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는데 둘 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이 매개체가 되어서 비교적 빠른 시간에 연인이 되었다. 당시 동네 모임은 돌싱들이 모여있는 모임이어서 굳이 내 신분이 과거가 어땠는지 밝힐 필요도 없었다. 나도 당시 여자 친구도 돌싱이었고 나는 아이가 없으나 상대방은 9살짜리 딸아이도 있었다. 그건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당장 같이 살 것은 아니고 상대방도 우리의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는 아이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으니 딸과 나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나도 받아들였다. 그렇게 행복이 나에게 다시 찾아온 듯했다. 둥둥 떠다니던 종이 쪼가리가 다시 배가 되어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헛된 희망은 절망의 씨앗이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였다.

자신이 아닌 남을 비난하기를 좋아하고 그건 연인이었던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옷 스타일, 헤어, 손톱, 밥 먹을 때 입을 벌리는 크기, 운전 스타일, 키, 외모 무엇하나 지적받지 않은 것이 없다. 지적이라기보단 비난이다.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 없이 지적만 했다. 그러다 내가 발끈하거나 반응하기라도 하는 날엔 장난도 못 치는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다시 되받아치며 다시는 대화할 때 장난을 치지 않아야겠다며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다툼에 대한 에피소드는 왕복 4차로에서 무단 횡단을 하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래도 사람이니 운전자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서행했고 학생도 중앙선에 멈추기에 천천히 지나가면서 별 의미는 없이 학생을 흘깃 쳐다보았다. 하다못해 창문을 내렸다거나 한 것도 아니고 경적을 울린 것도 아님에도 왜 학생을 쳐다보냐며 내가 잘못했다고 했다. 무단횡단이어도 사람이 먼저이니 차를 멈춰 세워서 보내주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으나 뒤에 따르는 차들도 있었고 횡단보도도 아닌 곳에서 무단 횡단하는 사람을 기다려줄 필요가 없고 바라본 건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본 것이라고 해도 나는 끝내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7개월을 만나며 대기업 생산직으로 일할 때였는데 미래에 관한 말들을 무수하게 쏟아냈다. 예를 들면 같이 산다면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싶다든지 우리의 아이는 몇을 낳고 싶다든지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기 좋아했는데 관계가 깊어지면 보여준다던 자신의 딸은 사석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7개월의 가스라이팅을 이기지 못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흉통과 두통이 동반된 고통에 시달리다가 헤어짐을 선택했다. 납득시키는 데에만 3번의 유예기간이 필요했다. 그녀에게 벗어나고 나니 스트레스와 신체에 느껴지던 고통이 싹 사라졌다. 억압되었던 삶이 자유를 되찾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무서워졌다. 곰곰이 떠올려 봤을 때 친하게 지내던 그 친구와 나르시시스트 여자 친구의 외모는 꽤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격은 너무 다르긴 하지만 외적인 모습이 닮아 있다고 느끼는 건 내가 그 친구를 무의식 중에 많이 생각함으로써 현실로 끌어당겨 비슷한 사람이 나타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의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내가 7개월의 시간 동안 연애라는 허울의 울타리 속에 갇혀서 고통받고 상처 입던 날들을 그 친구도 겪었을 것만 같았다. 결국엔 인과응보라는 결과로 운명이 나에게 알려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휘말려 허우적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지혜는 돌고 돌아 다시 하늘에서 내려 어깨를 적시는 비처럼 관심을 주지 않아도 곁에 와있다는 사실이다. 아팠던 과거는 아프기만 한 상처가 아니다. 상처를 잘 치유해서 새살이 돋고 흉터가 생기면 몸에 새겨진 교훈이 남는다. 앞으로 인생에 내리는 비가 후회라는 기름으로 얼룩지지 않게 운명이 주는 가르침을 유념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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