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기대하고, 실망하는 삶
이름 모를 소녀가 나를 보며 방긋 웃어주었을 때,
비로소 설렘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찾아왔다.
그땐 아무것도 모르던 순수한 소년이었던 나도 그 소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설렘은 순수했지만, 이어서 또 다른 친구를 데리고 들어왔다. 욕심이다. 잠깐의 기분 좋음을 뒤로하고 욕심은 소녀가 나와 가장 친밀한 관계임을 주변에 공표하고 싶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최선을 다해 소녀의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소년이 주변에 다가오려고만 해도 나름 몸집을 크게 부풀리고 위협을 가했다.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나는 마치 레서판다의 위협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또래보다 성장이 느린 편이어서 더욱 그랬다.
매일 소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상상했고, 행동했다.
마침내 어느 날엔가 소녀는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 말고 ‘나도 널 좋아해’라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이후 주변상황은 단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어도 내 마음은 무지개가 떴다. 너무 아름답고 황홀했다.
만 10년 인생에 제일 기뻤던 하루였다.
적어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걸 보면 확실하다.
이렇듯 설렘은 욕심을 데려왔고 욕심은 한 소년을 행동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기대라는 왕의 통치 아래서 벌어지는 일임을 아주아주 나중에 깨달았다.
기대는 비단 이성 간의 관계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살아가는 모든 하루마다 기대가 나타나지 않는 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길 기대하고, 예상치 못했던 행운이 찾아오길 기대하고, 일상이 특별해지길 기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하고, 금요일 밤의 치맥파티를 기대한다.
모든 상황에서 기대라는 왕은 마음속 감정들을 거느리며 통제한다. 특히 설렘이라는 신하가 목소리를 낼 때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신하를 다스리기 위해 애쓴다.
기대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에 기대로 인한 성공보단, 실망사례가 훨씬 더 많다. 구매를 해도, 하지 않아도, 괜히 기대하게 만드는 로또복권처럼 말이다.
다만 실망하더라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각자의 상황들이 기대감을 적절하게 조절한다.
‘그럼 그렇지...’
이 짧은 한마디의 소회는 대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알고 보면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사에 계속해서 큰 기대를 갖고 산다면, 실망하다 결국 많은 것을 이룰 수 없음에 힘을 잃어 무기력에 빠지고 말 것이다.
기대를 품지 않을 방법은 없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히 생겨난다. 기대가 주는 성공사례의 기쁨은 인간이 알고 있는 단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고백에 성공한 날, 노력과 관심을 쏟아붓던 일이 성공했을 때, 복권에 당첨 됐을 때, 응원하는 스포츠 팀이 우승했을 때처럼 심지어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도 기대심리가 반영되는 곳이라면 엄청난 환희가 찾아온다.
말 그대로 도파민 뿜. 뿜.이다.
인간이 기대라는 감정의 씨앗에 물을 주고 싹을 틔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실패의 사례가 훨씬 많더라도, 관심과 노력으로 피워낸 결실이 너무나도 찬란하고 예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비록 봄철에 벚꽃같이 아주 찰나에 왔다가는 순간일지라도
눈에 담고 기억 속에 각인되는 그 짧은 환희의 순간을 위해 살아간다. 끊임없이 기대하고, 실망하고, 또 기대한다.
그렇기에 인생이 재밌는 것이 아닐까?
한 치 앞도 예견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고, 항상 배우고 습득하고 성장하는 삶이 펼쳐진다.
아무리 깊은 지하에 파묻힌 사람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더라도 실낱같은 빛이 스며 광명이 찾아들길 기대한다. 기대하는 자신이 싫어서 기대하면 실망한다는 속설을 피부에, 뼈에 새기며 자신을 괴롭힌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인생은,
늘 좋은 일만 생길 수 없고,
늘 나쁜 일만 생기지도 않는다.
기대가 피어오를 때, 너무 억누르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
아무리 강한 씨앗도 강하게 압박하면 절대 피어날 수 없다.
‘적당히’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기대하면 된다.
적당히라는 기준은 자신의 틀에 맞게 세우면 된다.
그 누구의 기준보다 확실한 자신만의 틀이 있다면 그동안 도처에 있음에도 마주하지 못했던 행복을 누구나 마주할 수 있다.
오늘도,
기대하고, 실망하길 바란다.
그만큼 단단해진 땅에서 피어나고 자란 열매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마음 안에서 아주 눈부시게 빛나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