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련

지금, 여기, 현재

by 정수윤세

우리는 왜 지나가 버린 과거를 온전히 놓아 보내지 못할까?

좋은 기억에는 특히 미련이 생긴다.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조금 더 좋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과거는 현재의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과거가 나빴던 좋았던 현재와 미래에서는 더 밝고 좋은 미래를 꿈꾸고 살고자 하는 기대를 갖는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항상 지향하는 방향은 자신보다 위에 시선이 닿아있다. 아래로는 잘 쳐다보는 일이 없다.


삶이 무료하고 어떤 하루든 일상이 똑같고 지겹다고 말하며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주변에 사람도 역시나 마음 한편에는 당연히 더 나은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 될 수 없다고 혼자서 단정 짓는다. ‘다 해봤는데 부질없더라’ 또는 ‘그렇게 애써봐야 나중에 가면 다 똑같다.’라고 말한다.

인생이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으면서도, 행여 쌍둥이라 해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는 없음에도, 마치 과거에 살아온 기억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미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었고, 여러 방면으로 나름의 노력에도 이루지 못했을 때 부정적인 말들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누군가는 이미 이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롭게 이룰 것이다.


각자가 최선의 노력을 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도중에 포기한 사람은 목표를 이루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에너지가 닿는 데까지 미친 듯이 노력해 본 사람들은 오히려 저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후련하다고 하며 도전했던 에너지로 다른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


미련을 가지는 사람은 집착하기 쉽다. 과거에 심하게 집착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가지고 타인들도 모두 하지 못할 거라며 폄하하고 비난하게 된다. 성공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서 자신이 마치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사람인 것처럼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일삼고 실패하면 ‘거봐 힘들 거라고 그랬잖아’라며 기뻐한다.

반대로 성공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을 다해 축하해주지 못한다. 강한 집착은 은연중에 우월감을 가지게 하는데 자신이 아닌 타인이 성공하는 것은 우월감이 무너지는 상황이기에 그렇다. 급기야는 현실을 부정하고 편법을 사용했을 거란 의심을 입 밖으로 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온갖 방법을 통해 자신의 아래로 끌어내리고자 하다가 끝내 실패하면 결국에는 회피한다.


미련이 집착으로 변질되어 끔찍하고 흉악한 범죄까지 이어지는 사례들이 있다. 그 어떤 이유에서도 가해자의 입장은 합리화되거나 정상참작 될 수조차 없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는 모두가 만족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 것이다. 굳이 상대방에게 물리적, 심리적 피해를 주려는 행위는 이유가 무엇이건 결코 용인될 수 없고, 사고회로가 비정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연인과의 관계에서 여러 번 다투다가 결국 이별을 말하는 순간이 왔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이별을 먼저 말한 사람이 미련을 가지고 다시 잘해보자는 연락을 하는 경우도 수도 없이 보았을 것이다. 이유는 미련이고 미련은 충동에서 온다. 여기서 말하는 충동이란 간단하게는 성적 충동이 되기도 하고 시간 속에 함께 녹아들어 있던 일상이 사라지는 두려움이며 안정감과 익숙함에 적응하고 살았는데 신기루처럼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허전함이다.


다이어트 중에 식단 조절을 하다가 일상이 힘들거나 지치면 좋아하는 음식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충동이다. 충동을 잘 억제하고 절제하는 통제력을 가진 사람은 미련을 두는 일이 적다. 불현듯 헤어진 연인이 머릿속에 떠올라도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게 한다. 반면 미련을 두는 사람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고 가정법을 대입하며 결국에는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의 결론으로 상대를 괴롭힌다.

성숙과 비성숙의 영역도 아니다. 그저 개인의 ‘통제력’의 차이다. 아무리 평소에 성숙한 사람이라도 통제력을 잃고 바뀌기도 하고 평소 비성숙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도 통제력이 뛰어나면 급변하는 위기의 상황이 왔을 때 크게 흔들리지 않고 헤쳐나간다. 통제력을 기르는 것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 내기에는 굉장히 많은 힘과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어쩌면 살아오는 동안 했던 모든 행동 양식들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통제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다만 오래전부터 관습처럼 몸에 배어 있기에 자신이 통제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감정적, 생리적인 한계는 존재함에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나 욕구나 충동, 태도, 선택 노력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없는 범위인 사회적, 환경적 영역에 있어서는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세렌디피티 기도문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며, 그 둘을 구별할 지혜를 주소서’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탄생, 죽음, 과거, 자연재해 등이 그렇다. 사람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과거에 대한 미련과 충동과 고집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지 말고 과감히 바꾸려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며 시선을 뺏기거나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지나온 과거들이 밀어주는 방향키에 몸을 맡기고 돛을 펼쳐 지금 현재의 바람을 타고 앞으로만 나아가면 된다.


현생을 느끼는 순간을 자리에 가만히 앉아 느껴보길 바란다.

눈을 감고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그 순간에도 지나가는 찰나의 과거들을 몸속에서 빠져나가는 공기처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현재의 내 숨이 닿는 곳에 관심을 쏟는 인생을 모두가 살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