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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Apr 05. 2023

한지민과 공유. 그리고 신이 내린 부대찌개.

열등감에 이름을 붙이던 날

예전에 용돈도 벌 겸, 촬영현장이 궁금하기도 해서 영화 보조출연을 나간 적이 있다. 보조출연을 간다고 하면 흔히 받는 질문들이 있는데,


1. 보조출연을 나가면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코앞에서 볼 수 있나요? >> ㅇㅇ 그럴 때도 있어요.

2. 그럼 배우들에게 말도 걸고 사인도 받을 수 있겠네요? >> ㄴㄴ 안 돼요.

3. 최애 배우랑 친구 먹을 수 있나요? >> 드라마 너무 많이 보심.


케이스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보조출연자는 동원되는 인원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일일이 다가와 배우에게 말 걸고 사인을 요구하면 현장은 당연히 아수라장이 된다. 또한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들도 가뜩이나 백 명 정도 되는 스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기를 해야 하는 판에 보조출연자들까지 주변을 메우고 있으면 아무래도 집중해서 연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보조출연자들과 배우들은 꼭 같이 찍어야 하는 장면이 아니면 대체로 떨어져 있게 되고, 보조출연자든 스텝이든 배우들에게 쓸데없이 말을 걸거나 사인을 요청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나 역시 다른 영화에서 50명이 넘는 스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혼자 연기를 했던 경험이 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한창 여기저기 보조출연을 나가던 시절, 난 개인적으로 연모하는 배우를 영화현장에서 실제로 보게 되었다. 배우 한지민 님이었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라고 한다면,

눈이 부셨다. 고 기억한다. 너무 예뻐서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봐 그녀가 날 쳐다봤을 때 황급히 눈을 피했던 기억이 그런 식으로 윤색되었던 거 같다.


영화의 조연급 배역 중에 머리가 하얗게 센 일본 장교 역할이 있었는데, 그의 뒷모습을 찍어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 한 컷 때문에 일본에 있는 배우를 부를 수는 없었는지, 아님 스케줄의 이유였는지 그를 대신할 뒤통수 대역이 필요했고 300명 정도 되는 보조출연자들 가운데 내가 그 대역으로 낙점되었다. 그 일본 배우와 내 뒤통수가 어지간히 닮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난 흰머리로 염색(스프레이 염색이다. 머리 감으면 지워진다.) 하기 위해 무려 주연배우들과 분장실을 같이 쓰게 되었고 거기서 제일 먼저 본 사람이 배우 송강호 님이다. 어슬렁거리면서 동네 아저씨처럼 돌아다니는 그를 보고 헐... 송강호다.. 이러고 있는데,


'선배님!!'


그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어. 어디선가 청량하고 향긋한 봄냄새가 나는 듯 화사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였다. 한지민이었다. tv에서 보이는 차분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꽤 생기발랄했던 그녀는 송강호에게 핸드폰 사진을 요렇게 조렇게 보여주며 잘 나왔죠?? 하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저 눈부신 미소가 나한테도 닿았으면 하는 맘이 간절했지만 미천한 나의 눈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녀의 순수한 동공이 오염되기라도 할 것처럼 난 냉큼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눈조차 마주치기 힘든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했다.

그렇게 송강호와 한지민이 사이좋은 부녀처럼 재잘재잘하고 있을 때 어디서 커피냄새가 난다 했더니 불쑥, 배우 공유 님이 나타났다. 난 개인적으로 공유 님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그를 본 순간, 왜 여자들이 공유를 좋아하는지, 그가 왜 커피 cf를 찍게 되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커피가 걸어왔다. 그가 뿜어대는 분위기는 tv를 통해 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그윽해서 나지도 않는 커피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난 그때 글에는 관심 없이 오직 연기에만 몰두하던 시절이었기에 말도 안 되는 분위기를 풍기는 공유를 보면서 보조출연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돌연 초라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눈조차 마주치기 힘든 한지민과 저렇게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다니.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패배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그렇게 싸워보지도 않은 상대로부터 패배감만 곱씹고 있던 내 옆에 갑자기 한지민이 확, 앉았다. 그냥 분장실의 빈 의자가 내 옆에 있어서 앉은 것뿐인데 긴장한 난 나도 모르게 정면에 있는 거울만 응시하며 숨을 죽이게 되었고, 한지민과 공유는 날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재미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공유는 걸어 다니는 커피답지 않게 의외로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 나는 그에게 꽤 적대적이었다. 흥. 커피는 무슨. 수다스럽기만 하고 노잼이잖아? 귀에서 피날 거 같다고. 입 열면 깨는 스타일이군. 재수 없어. 카누 안 먹어. 난 그렇게 속으로 열등감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투명인간처럼 숨만 쉬고 있던 나를 기어코 그들이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는데, 한 차례 촬영이 끝나고 점심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난 그날 대역 촬영이 좀 딜레이가 돼서 다른 보조출연자들보다 늦게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미 다들 한창 밥을 먹고 있어 자리가 여의치 않았는데 마침 한 무리의 출연자들이 우르르 일어서는 바람에 테이블 하나가 텅 비어버렸고 나는 냉큼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6인석 테이블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밥을 우걱우걱 먹다가 문득 옆을 보니 바로 옆테이블에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모여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물론 한지민과 공유도 함께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또 숨을 죽이며 밥을 먹었지만 온 신경은 옆테이블에 집중되었다.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밥을 코로 집어넣고 있었는데, 돌연 옆테이블에 밥을 다 먹은 사람들이 하나둘 먼저 일어서더니 또 한지민과 공유만 남은 것이다.

처음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먹던 부대찌개가 거의 손도 안 대고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나 역시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부대찌개 따위가 대체 무어가 문제냐 싶겠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난 그때 배식도 귀찮아서 대충 반찬 몇 가지만 조촐하게 두고 밥을 먹고 있었고, 밥을 다 먹은 한지민과 공유는 남은 부대찌개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먹다 남은 거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새거나 다름없는, 스팸이 알차게 들어있는 부대찌개를 버리기 아까웠던 두 사람은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일찍이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있었던 나는 누구에게든 찌개를 주고 싶어 안달이 난 그들의 얼굴만 봐도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부대찌개는 그냥 부대찌개가 아니었다. 배우들과 말을 섞으면 안 되는 불문율에서 벗어나 한지민과 말 한마디 섞을 수 있는 동아줄, 신이 내린 부대찌개인 것이다. 내 안에서 부대찌개를 향한 심한 내적갈등이 시작됐다.


저 부대찌개가 보이는가? 지금이야. 네가 먼저 말을 걸 필요도 없어. 그저 환한 미소로 밥을 씹다가 우연한 척 그녀와 눈만 마주치면 돼. 그럼 한지민 님이 알아서 오셔서,


한지민 - 저.. 부대찌개가 좀 남아서 그런데 괜찮으시다면 드시겠어요? 거의 손도 안 댄 건데 되게 맛있어요.


백번 손댔어도 먹을 수 있어요. 하지만 서두르면 안 돼. 천천히 고개를 드는 거야. 그렇게 짐짓 부드러운 커피 향이 나는 미소를 만면에 띠고,


나 - 아까운 음식을 버리면 되나요. (싱긋) 잘 먹을게요.


젠틀하게 한 마디 해주면 되는 거야!! 남자 주인공처럼! 공유처럼!!


하지만 좋아하는 배우한테는 눈도 못 마주치는 주제에 애꿎은 공유한테 열등감만 느끼고 있던 못난 무명의 배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찮은 자존심을 내세웠다.


나1 - 나도 같은 배우인데, 먹던 걸 먹을 수야 없지.

나2 - 뭔 dog소리야?? 손도 안 댄 거야!

나1 - 노노. 공유가 먹던 거 시룸.

나2 - 이게 무슨 개떡 같은 밑바닥 자존심이야??


코로나도 없던 시절, 내가 영양가 없는 극심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사이 주변을 둘러보던 한지민과 공유의 시선은 점점 확정적으로 나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옆테이블, 그러니까 6인석 테이블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심지어 머리도 하얗게 염색해서 반찬도 몇 개 없이 외롭게 밥을 먹고 있는 나는 너무나 그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최적의 존재였고, 나중엔 아예 대놓고 빤히 날 쳐다보고 있던 그들을 난 이 악물고 모른 척하고 있었다.


어쩌지. 나한테 다가와 기어이 저 부대찌개를 내밀면 어쩌지? 한지민이 천사 같은 얼굴로 ‘부대찌개 좀 드실?’ 하면 난 ‘ㅇㅇ’ 하고 무력하게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데. 그럼 지는 건가? 이기는 건가?


내 생각에 그때 단 1분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아마 한지민 님이 내게 부대찌개를 권했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왜냐면 그녀는 나한테 다가오려고 의자를 빼고 일어서기 직전이었고, 버리긴 정말 너무 아까울 정도로 건들지도 않은 찌개였으므로.

하지만 그때 현장을 마무리하던 스텝들이 뒤늦게 우르르 들어왔고 마침 잘 됐다 싶은 공유는 바로 손을 들어 스텝들을 불렀다. 그리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방금 전까지 날 겨냥했던 대사가 나왔다.


‘이거 부대찌개인데, 진짜 손도 안 댄 거거든? 너희들 먹어.’


스텝들의 고맙습니다! 하는 말을 뒤로하고 한지민과 공유는 미련 없이 식당을 나갔다. 나 홀로 숨 막히던 눈치게임은 그렇게 막을 내렸고, 예상치 못한 커다란 허탈감이 밀려왔다. 난 그때까지도 스스로 공유 님한테 열등감과 시기질투를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혹은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낯 뜨거운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진 난 하릴없이 밥알만 세고 있을 뿐이었다.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을 결핍으로 내재한 캐릭터를 쓸 때, 난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그때는 진지했고 지금은 웃음이 나는, 나의 열등감이자 나의 부끄러움은 이제 내가 캐릭터를 만들 때 조금씩 스며들어 간다.

난 여전히 열등감을 밥알처럼 세며 밤을 보내기도 하고, 남들에게 열등감이 노출되지 않게 애써 어른스러운 웃음으로 감추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마흔이 넘었어도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들키는 건 여전히 부끄럽다. 아마도 예상엔, 죽을 때까지 계속 부끄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부끄러움을 나누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현실의 삶에서 열등감을 드러내는 건 자칫 트라우마를 각오해야 할 정도로 깊은 쪽팔림을 감수해야 하지만, 글 뒤에 숨으면 그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열등감을 하나씩 나눠 받은, 애정하는 나의 캐릭터들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아, 나도 저런 적 있는데!’ 하며 공감하고 웃음 짓게 할 수 있기를. 당신만 열등감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고. 당신만 이불킥을 날리며 잠드는 게 아니라고. 당신만 혼자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고. 알고 보면 다들 그렇게 귀엽게 살아가고 있다고. 모두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하다못해 글쓴이인 나는 그러하노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안심하고 웃다가 잠들 수 있게. 나의 열등감을 예쁘게, 정성 들여 깎고 다듬는다.

근데 참 이상하지. 카누는 여전히 입맛에 안 맞는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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