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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Apr 02. 2023

넌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잖아

하고 싶은 일의 아이러니

2년 정도, 유랑극단처럼 전국팔도를 돌아다니며 지방공연을 순회한 적이 있다. 보통 지방공연을 한다고 하면 일도 하고 여행도 하니 얼마나 좋게요? 라고 생각하기 쉽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여행유튜버나 여행 작가 등 여행을 콘텐츠로 삼은 크리에이터들의 고단함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한 지역에서 장기 공연을 하는 게 아닌,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일주일에 이렇게 두세 지역을 순회하는 공연의 특성상 실제적으로 공연하는 시간보다는 무대를 만들고 해체하는 시간이 월등히 많은데, 1시간짜리 공연이어도 무대를 접었다 폈다 하다 보면 5-6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이동시간도 만만치 않아서 한 번 스타렉스에 타면 두세 시간쯤 찌그러져 있게 되는데, 그 시간 동안 책을 읽거나 대본을 보거나 하면 되잖아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시라구욧. 라고 하기엔 조명 장비, 음향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차에 실려가는 처지이기에 그조차도 녹록지 않다. 내가 조명이요, 조명이 곧 나인 비몽사몽한 렘수면의 경지에 오르면 좀 편해질 수 있다.


난 연기하러 왔는데 왜 망치질을 더 많이 하는가? 에 대한 자아성찰이 불쑥 찾아올 수 있다. 그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패티 구우면서 한 적이 있다. 난 배우인데 왜 햄버거 만드는 시간이 더 많은 거지? 햄버거가 최애 음식이라 맥도널드에서 일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 시간들을 겪으며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해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대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산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빛나는 순간, 그 아주 짧디 짧은 삶의 카타르시스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인생의 상당시간을 하기 싫은 일에 과감하게 투자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고,

하고 싶은 일은 날 행복하게 해 주지만 하기 싫은 일은 날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고,

보통 삶에 금이 갈 정도로 치명적인 절망은 하기 싫은 일보단 오히려 하고 싶은 일에서 종종 발생하는데, 하기 싫은 일이 다져준 단단함이 결국 날 구원해 준다는 것이다.




오늘도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글을 쓰는 삶을 위해 기꺼이 맞닥뜨린 하기 싫은 일들이 날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중일 거야.


오늘 선별진료소에 출근했더니 똥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이걸 어떻게 예상하지? 당신이 만약, 오늘 출근하면 선별진료소 바닥에 4개의 똥과 하나의 오바이트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면 그건 악마의 상상력이다. 사탄 들린 거다. 그래도 여기가 관공서인데. pcr검사하는 의료기관인데. 이렇게 여기저기 모락모락 자리하고 있을 일이 아니란 말이다. 나의 상상력을 가볍게 유린하고 찾아온 불행 앞에서 망연하게 ‘난 글을 쓰는 사람인데 왜...?’를 읊조리던 내 머릿속에 문득 친구들이 곧잘 하던 말이 떠올랐다.


‘넌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잖아.’


그래. 덕분에 내가 요즘 얼마나 단단해지는지 모르겠다.

삶은 언제나 날 희롱하고 불행은 자비 없이 변화구를 던져오지만, 난 너보다 단단하니까 치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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