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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Mar 15. 2023

신이 직업이 되면 생기는 고충

인내 한 스푼.. 재능 한 스푼.. 매력은 다섯 스푼.. 앗, 으어어헉!

'눈빛이 너무 맑으세요.'

'눈빛'에게 '맑으시다'는 존칭을 써가며 예의 바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길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대체로 바빠요. 하고 지나쳐버리는데, 가끔은 조언을 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전문 작가를 섭외해서 대사를 좀 바꿔보시는 게 어떨까요? 눈빛이 맑다든지, 영혼이 선하다든지, 인상이 좋다든지. 이런 류의 대사를 몇 년째 우려먹고 계신데, 작가들이 대사 한 마디 쓸 때마다 얼마나 고심을 거듭해서 쓰는지 아신다면 일을 그렇게 나태하게 하시면 안 됩니다.


어린 시절,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도 그렇고 장래희망을 신이라고 말하는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다들 그 정도 배포는 없었던 것일까. 보통 자신을 신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처음 들어본 생소한 종교를 창시한 수상한 어른들 뿐이다.

자신을 신격화시켜 신도들에게 차마 드라마로 쓰고 싶지도 않은 각종 몹쓸 짓을 하고 다니는 사이비 교주들을 보면, 그저 신앙을 이용해 신도들을 착취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그들을 보면 새삼 나 자신에게 질문이 생긴다. 난 어떤 신이 되어야 하지?


드라마를 쓰려면 그게 단막이든 16부작 시리즈물이든 하나의 신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신이나 다름없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뭐든 맘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 마련이지만, 정말 물정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감사하거나 무언가를 바라거나 죄송하다 회개하거나 하는 일은 많지만 신이 업무적으로 얼마나 바쁘고 골치 아픈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막상 신의 입장이 되어보면 신경 써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신은 전능하니까 어려울 것 없을 거라 생각하고 신의 고충을 외면들 하시는데 신 입장에서는 자꾸 그러면 삐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을 창조하는 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전능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보다 세상을 다스리는 게 더 쉬운 전능한 신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만든 세상이 나한테 너무 쉬워버리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인생의 희로애락과 삶의 의미 같은 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것 따위 이해하지 않아도 세상을 다스리는데 아무 상관없을 테니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신이 내키는 대로 휘두르는 풍파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인물들을 보며 시청자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역시 신의 콧방귀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미천한 인간의 삶 따위,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신이 정해놓은 운명을 그저 해석하는 삶 따위 빨리 끝내버려야지. 삶의 의미보다는 허무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난 글을 쓰면서 내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인간임을 새삼 감사하게 된다. 내가 만든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부족하거나, 상처받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나의 단점과 열등감과 상처와 결핍을 하나씩 나눠 받은 캐릭터들은 그래서 내가 하나하나 보듬어주고 불을 밝혀줘야 할 존재가 된다. 그렇게 신이 바쁘고 힘들고 정성을 들여야 그들의 세상을 통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난 어떤 신이 되어야 할까.

난 종교가 없는 사람이지만, 꽤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책 속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낮은 곳에 임하소서.





아, 이런 일이 있었군요.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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