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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Mar 13. 2023

열역학 제2법칙

마법을 부리려고 마법서를 펼쳤는데 과학책이라 난감하다.

글을 쓰다 보면 실제적으로 글을 쓰는 시간보다 취재나 자료조사하는 시간이 더 많을 때가 왕왕 발생한다. 그렇게 한창 자료조사에 심취하다 보면 검색창에 종잡을 수 없는 검색기록들이 남곤 하는데, 과거 범죄수사물로 단막을 쓰던 시절 나의 어지러운 구글 검색창을 보며 괜스레 주변 눈치를 살핀 적이 있다.

'알리바이 조작', 'CCTV 사각지대', '토막 내는 법', '수면제 어디서 사나요.'...

어쩐지 카페 옆자리에 혼자 노트북을 하는 여자가 날 힐끗거리는 것 같다. 내 검색기록을 본 걸까. 날 흉악범으로 오해하고 정의로운 시민의식을 발휘해 몰래 112에 신고하면 어쩌지. 신고받고 온 형사가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잠시 서로 가실까요?' 임의동행을 요청하면, 나도 드라마에서 본 대로 '영장부터 들고 오시죠.' 라며 태연하게 응수해야 하나. 형사가 온화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날 긴급체포해서 구속시킨 다음 48시간 안에 판사님으로부터 영장을 받아오면 어쩌지. 그렇게 되면 난 형사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되지 않을까. 선생님. 그게 아니고요..


이것저것 다양한 습작을 쓰다 보면 작품의 장르에 따라 검색어들의 장르도 바뀌는데 범죄수사물 이후, 난 SF에 도전해보고 싶었고 토막살인범의 일기 같던 내 검색기록은 순식간에 다음과 같은 검색어들로 장악당했다.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중성자 실험', '자기장과 전기장의 관계' 기타 등등..

유치원 졸업식 날, 물리학자가 되겠다며 장래희망 송을 열창했던 난 초중고 교육과정을 착실하게 밟으며 착실하게 수포자가 되었고, 역시 그때 주문을 잘못 외었던 거구나. 지엄한 깨달음 속에 수학이나 과학 쪽은 내 인생에 더 이상 동참시키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근데 지금 난 왜 열역학 제2법칙을 공부하고 있는 거지.

물리가 뭔지도 모르고 물리학자가 되겠다던 꼬마는 과학을 포기하고 나서야 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뭔가 굉장히 역설적인 상황에 갇혔음을 직감한 난 복잡해진 머리를 식힐 겸 게임에 접속했다.


난 게임을 잘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빠르고 격하게 렙업 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단 빈둥거리며 느긋하게 렙업 하는 편이다. 요즘은 사실 느긋하다 못해 나태하기까지 하는데 그 이유는 이 게임이 너무 어렵다는 거다. 렙업을 하려면 생긴 것만 봐도 무섭게 생긴, 대형도끼를 자비 없이 휘둘러대는 우락부락한 보스를 잡아야 하는데, 그 난이도가 어려운 것을 넘어 괴랄하기 때문에 미리 유튜브에서 공략 영상을 보며 보스의 공격 패턴과 특수 기믹 등을 파악해야 한다. 러닝타임만 해도 10분이 넘는 공략 영상은 그조차도 한 번 보고는 뭐가 뭔지 잘 파악이 안 되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영상을 반복해서 봐야 조금씩 숙지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물리적인 시간만 따져도 30~40분 이상, 많게는 1시간씩 소요되는 셈이다. 그렇게 공략 영상을 미리 숙지하고 게임에 들어가도 나의 저주받은 컨트롤 때문에 클리어하기도 녹록지 않다. 즉, 게임 한 판 하려면 미리 유튜브 공략 영상을 1시간 정도 정독하고 가야 한다는 뜻이다. 공부하기 싫어서 게임을 틀었는데 게임을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역설의 늪에서 인생의 쓴맛을 곱씹던 난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맞아. 원래 그런 거였지. 좋아하는 것을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 거였지.


철없던 학창 시절, 난 공부하기 싫어 가수가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수가 되기 위해선 화성학을 공부해야 했다. 학교에선 그렇게 공부하기 싫어 요리조리 도망 다니던 녀석이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스스로 학원을 찾아가 강의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화성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어느덧 꿈이 가수에서 배우로 변했을 때,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난 서점에서 연극사, 연기론에 관한 책을 사들고 무작정 대학로로 향했다. 수도 없이 오디션에서 탈락해 가며 하나씩, 하나씩 공연을 해나가던 나는 그 와중에 끊임없이 책을 읽고, 선후배 동료들의 연기를 보고, 내가 맡은 배역을 이해하기 위해 혼자 배우 일기도 쓰고, 나의 연기를 이리저리 찍어보면서 쉬지 않고 공부했다. 어떻게 하면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을까.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어른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철없던 고등학생은 어른이 되면서 공부를 일삼고 다니는 공붓벌레가 되었다. 좋아하는 게 생겨버리는 바람에.


내가 끝내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 내 삶이 멈춘 적이 없다는 것은 알겠다. 좋아하는 게임 한 번 할래도 공부를 해야 하는 판에. 여자친구가 삐질 때마다 왜 삐졌지 공부해야 하는 판에. 탁구에 빠져 장래희망이 탁구 선수가 된 거 아닌가 싶은 일흔의 우리 엄마가 한 번 틀면 멈추지 않고 계속 유튜브 탁구 영상을 보시는 바람에 난 오늘도 더 글로리를 내 방 컴퓨터로 봐야 한다. 좋아하는 것은 좀처럼 멈춰지지가 않기에 공부는 영원을 얻는다. 애초에 역설 같은 건 없었다.


<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는 감소하지 않는다. > 세상의 무질서를 꽤나 매력적으로 정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통계를 내고 트렌드와 경향을 분석하며 어떻게든 세상의 질서를 예측해보려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꿈과 욕망이 뒤엉켜 만들어지는 수많은 결과물과 그 결과물이 세상에 미치는 수많은 영향들을 우리는 감히 예측할 수 없다. 그저 무질서라는 단어로 퉁칠 수밖에. 덕분에 세상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덕분에 꿈을 꿀 수 있었다. 예측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관측되는 순간, 사라지는 양자처럼 더 이상 그 어떤 가능성도 될 수 없다.

나의 꿈이 어떤 이의 꿈과 무질서하게 뒤엉키는 상상을 해본다. 엔트로피가 감소하지 않는 이상, 나의 꿈은 수많은 누군가의 꿈들과 끊임없이 무질서하게 뒤섞일 것이고 기회도 무질서하게 올 것이다. 도둑같이 찾아올 기회가 내게서 뭔가 얻을 게 있나 두리번거릴 수 있게 난 멈추지 않고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


엔트로피에 대한 지극히 문과적 해석이지만,

과학이 그랬다니까 한 번 믿어본다. 이과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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