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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Mar 13. 2023

자네, 대학생인가?

아니오. 짐작조차 못하셨겠지만 전 스파이더맨입니다.

글을 쓰러 집을 나서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위층에 사시는 어르신이 계셨다. 안면이 있는지라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같이 탔는데, 어르신께서 나를 슬쩍 훑어보시더니 인자한 얼굴로 물어보셨다.

'대학생인가?'

난 나이가 잘 가늠이 되지 않는 동안의 40대로 가끔 이런 장르의 질문을 받긴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대학생은 갭 차이가 좀 크다 싶어 나도 살짝 당황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동안과 잘생김은 다른 단어라는 것을 명시해두고 싶다.


난 반사적으로 '대학생 아닙니다. 허허.' 라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근데 그다음에 쳐야 할 대사가 어쩐지 난감했다. 이 어르신께 나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지? 아직 입봉 하진 않았으니 불혹의 작가 지망생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글을 쓰고 있긴 하니까 작가라고.. 아, 이왕이면 멍작가라고 불러주세요. 이렇게 얘기를 해야 하나? 아니면 동네 선별진료소에서 코로나 검체를 분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전염병으로부터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 의료계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라고 얘기해야 하나. 마치 교실 앞에서 자기소개의 늪에 빠진 초등학생마냥 눈만 껌벅이던 난 간신히 애드립을 쳤다.

'(글을 쓰러 카페로) 출근하는 길입니다. 허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카페로 걸어가면서 왠지 모를 씁쓸함을 곱씹고 있는데, 문득 스파이더맨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평소엔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어느새 입고 있던 셔츠를 두두둑, 뜯어 헤치고 안에 입은 스파이더 슈트를 드러내며 짜잔! 등장하는 우리들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난 개인적으로 그의 인성을 높게 평가한다.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스파이더맨의 활약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주저 없이 스파이더맨이 이상형이라고 밝히는 미녀들을 보며, 난 커서 대통령도 과학자도 아닌 스파이더맨이 될 거야! 호기롭게 외치는 아이들을 보며, 나 이것 참 어쩔 수 없군요. 사실 난 스파이더맨이라고요. 라고 밝히지 않았다는 건 어지간히 고매한 인성이 아니고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진짜 빛나는 그의 인성은 따로 있다.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슈퍼파워를 가진 스파이더맨의 모토가 세상을 구하는 슈퍼 히어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친절한 이웃이었다는 사실.


아마 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불후의 역작을 써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내가 쓴 드라마가 백상예술대상에서 극본상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은 오징어게임처럼 물 건너가서 에미상을 휩쓸고 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상을 준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넙죽 받아오긴 하겠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드라마는 K-드라마의 세계적인 위상을 높여준다거나, 대한민국 콘텐츠의 자긍심을 월클로 세워주는 그런 히어로나 위인 같은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다.

숨 쉬는 게 더 재밌을 정도로 재미라고는 1도 없는 일상 속에서,

세상이 기가 막히게 나만 골라서 외면하는 것 같을 때,

입고 있던 셔츠를 두두둑, 뜯어 헤치고 달려와 안에 입은 슈트를 드러내고는

곁에 앉아 같이 팝콘을 먹어줄 친절한 이웃 같은 드라마.


언젠가 그런 드라마를 쓰고 나서 그 어르신을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그리고 '자네, 대학생인가?' 또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어 안에 입은 슈트를 숨기고는

'짐작조차 못하셨겠지만 전 스파이더맨입니다.' 라고

마음속으로 속삭일 것이다.


원래 스파이더맨은 그렇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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