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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Mar 13. 2023

마법사가 되고 싶었던 물리학자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마법사가 될 거야~

유치원 졸업식 때 아이들이 한 명씩 나가서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노래의 형식은 대략 이러하다.


'나는 나는 나는 나는~ ㅇㅇㅇ가 될 거야~'

아이가 앞에 나와 이렇게 열창하면,

'그래 그래 너는 너는 ㅇㅇㅇ가 되어라~'

뒤에 서 있는 학부모들이 이렇게 답가를 불러주는 장래희망 송이었다.


대체 비어있는 가사를 뭘로 채울 것인가. 7살 인생에 처음 맞닥뜨린 묵직한 고뇌였으므로 그로부터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 노래를 똑똑히 기억한다. 이 정도 선명하게 기억할 정도면 트라우마인 걸까?


한 번은 엄마가 사준 어린이 소설책을 읽고 거기 나오는 꼬마 주인공이 '난 시인이 될 거야!'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시인이라니. 대통령이나 과학자보다 더 있어 보였다. 꼬마였던 나에게 시인은 알 수 없는 말을 주문처럼 써놓고 다니는 세상을 통달한 마법사쯤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엄마 엄마, 나 시인이 될 거야. (마법사가 될 거야.)'라고 말했는데 그때, 어색하게 미소 짓는 엄마의 애매한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엔 엄마의 그 복잡한 얼굴이 뭘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지금은 대충 엄마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그런 엄마의 반응을 미리 겪어본 지라 마법사는 일찍이 후보군에서 탈락시킨 상태였다.


졸업식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난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일반적인 선택지는 대통령이나 과학자, 의사 정도였다. 하지만 그 나이에도 남들이 하는 걸 똑같이 따라 하긴 싫었는지 도저히 내키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시인이라고 말하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이미 엄마를 통해 리허설을 해봤으므로 다른 어른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난 나보다 3살 많은, 그러니까 3년 전에 나와 똑같은 유치원을 다녔고 졸업식 장래희망 송을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형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형은 그때 뭐라고 불렀어?


'난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형도 참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대체로 그런 계열은 다 '과학자'로 퉁치는데 당시 7살이었던 형은 기어코 거기서 물리학자를 세분화해서 불렀던 것이다. 화학자나 생물학자 등등은 싫다 이거지.

물리학자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물리학자가 대충 과학자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멋있어 보였다. 그냥 과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라니. 아무 생각 없이 과학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과학 영재 같은 느낌이 든달까. 남들이 하는 걸 똑같이 따라 하기 싫었던 난 그렇게 형을 똑같이 따라 하기로 했다.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물리학자가 될 거야~'


졸업식 날, 뒤에서 지켜보던 엄마 아빠들의 황당한 얼굴들을 난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아이들이 외치는 과학자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있었던 부모님들 입장에선 갑자기 물리학자라는 낯선 단어가 예고도 없이 툭 튀어나왔으니 순간적으로 당황할 법도 한 것이다. 과학자면 과학자지 물리학자는 또 뭔가.

황당함에 머뭇거리던 부모님들은 그래도 아이에게 답가는 해줘야겠으니 황급히 더듬더듬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래 그래 너는 너는 물리학자가 되어라.

어릴 때였지만 난 그 순간 내가 뭔가 중대한 실수를 했다고 직감했다. 어른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했던 선택이었는데 어른들 말고 다른 누군가를 배신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의 순서가 끝나고 난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내려왔다.


7살의 난 나의 미래를 내다본 것일까. 아님 내 안의 어떤 마법의 기운을 감지한 걸까.

그 후로 강산이 한 세 번쯤 바뀌고 나서,

난 결국 시인은 아니지만 시인 비스무레한 사람이 되었다.

그날 누군가를 배신했던 꼬마는 끝내 배신을 철회하고 마법사가 되어 돌아왔다.

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어떤 마법을 걸지는 지금부터 내가 외우는 주문에 달려있다.


나는 나는 나는 나는 ㅇㅇㅇ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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