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걷기 시작할래

번아웃된 워킹맘의 회복 일기

by 진심어린 로레인

어린 시절 방학마다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 가곤 했다. 문득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동네에 있는 저수지에 친구들과 함께 빠졌다가 살아난 분의 이야기다.

그분은 친구들과 장난치다 저수지 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수영을 할 줄 앎에도 친구들이 허우적대며 자신의 머리, 어깨 잡히는 대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대로는 도저히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잠시 힘을 빼고 물속으로 가라앉았는데, 아무도 잡아당기지 않자 그렇게 계속 가라앉다 보니 어느 순간 발이 바닥에 닿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필사적으로 저수지 벽을 타고 나와 다시 살 수 있었다고.


인상적이었던 그분의 저수지에서의 생존 방법이 번아웃을 극복하는 과정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몸과 마음에 힘을 뺀 채 안식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도 발바닥이 땅에 닿듯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 찾아왔다.


오늘은 이번 회복 일기 콘셉트의 마지막 글이다. 함께 글을 쓰는 모임에서 총 9번의 글을 쓰는 의무감이 주어졌을 때, 나는 번아웃된 나 자신이 얼마나 회복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일종의 실험정신에 의해 글을 쓰고 싶었다. 정말 나를 온전히 돌아보고 내면을 단단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내심 바라고 또 바랐다. 군더더기, 허영심이 일절 담기지 않는 진정한 회복의 과정을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고, 매주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로드맵이 정해지지 않은 채 글쓰기의 여정을 시작했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회복을 위할 뿐, 글을 쓰기 위한 무언가를 억지로 한 건 없는데, 신기하게 글을 쓰는 시간이 다가오면 적고 싶은 글감이 생겼다. 게다가 그간의 내 변화를 기록할 만한 에피소드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매주 A4 한 장 정도 글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지만, 글 쓸 거리가 자연스레 떠오르다 보니 감사하게도 시리즈를 끝까지 채울 수 있게 되었고 나 역시 몇 개월 사이 더 단단해졌다.


안식의 시간은 아무 계획도 짜지 말고 쉬자고 다짐한 대로 원 없이 소파 죽순이가 되고, 영화도 책도 드라마도 원 없이 보고,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면 바로바로 해 먹었다.

기회가 좋아 함께 하게 된 커뮤니티를 통해서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솔직한 내 마음들을 나누며 위로를 얻었고, 그들의 상처를 들으면서 함께 울기도 했다.


회복에 공식이 있냐고?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좋아지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좀 더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는 공식, 리추얼들은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시기를 마무리할 즈음, 나도 모르게 신랑에게 ‘자기야 나 더 건강해지고 싶어’라고 말했다. 병원 문을 드나들면서도 건강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우울감, 부정적인 생각들에 더 차있었는데 이런 다짐을 한다는 사실이 참 놀라운 변화였다.

그리고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운동량을 더 늘려가며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한동안 하지 않았던 공원을 다시 돌기 시작했다. 쨍해진 햇살에 기미가 걱정되어 챙이 긴 모자를 챙겼다. 힘들 때까지만 걷다가 집에 가야지! 하고 걷기 시작하는데 챙이 긴 모자라 시야가 많이 가려졌다. 고작 세네 걸음 앞까지만 말이다.


모자가 가린 좁은 시야로 불쑥 큰 개가 등장해 깜짝 놀라기도 하고, 경보로 걷다가 하마터면 전봇대에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그래도 모자를 벗진 않았다. 왜냐면 목표치가 낮은 터라 더 쉽게 가볍게 한걸음 내디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동네로 이사 와서 그날 처음으로 단숨에 2바퀴를 돌았다.

모자 없이 시야가 넓을 땐 눈앞에 먼 고지를 바라보며 지레짐작으로 ‘저만큼 걸어가면 충분해’, ‘아마 나는 저 정도면 되게 힘들어질 거야’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걸으면서 듣던 팟캐스트에서는 마침 ‘꿈에 대한 확신과 불안감은 비례한다, 꿈 그릇과 함께 불안감 그릇도 키워야 한다.’ 등의 꿈과 관련된 이야기를 쏟아냈다. 아마 그런 메시지들이 좋은 영양제가 되어 더 힘찬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이제 다시 무모한 용기를 내볼 때인가 싶다.


P.S

Thanks to

나무 같은 남편과 비타민 같은 두 아들

번아웃 시기를 함께해 준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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