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엄마의 진짜 이름을 물었다
똑똑똑, 초보엄마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무래도 통성명부터다. 서로의 이름을 묻고, 자연스레 관심사를 나누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 그것이 가장 기본이지 않은가. 새로운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중 누군가 내 이름을 묻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나에게 이득을 얻을 게 없을 것 같다는 암묵적 뉘앙스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길, 내 존재를 알아차려주길 목말라했다.
그런 나의 인생에 아이들이 찾아왔고 나는 내 이름 위에 엄마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런닝맨처럼 육아 레이스를 시작했다. 신생아 때부터 아기에게 엄마라고 나를 소개하며 새로운 이름표에 맞춰 내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아기가 돌 즈음부터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젠 하루에도 수도 없이 엄마라는 말을 듣고 있다. 우리의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도 진하게 서로의 인생을 파고들었다.
6살 3살 두 아들과 보내는 저녁시간은 단순하다. 저녁을 먹고 잠이 들기 전까지 아이들과 학습 활동을 하거나, 주로 놀이를 하며 보낸다. 하루는 큰 아이 수학 학습지를 풀기로 했다. 널따란 식탁에 둘이 앉아 학습지 진도를 나가는데, 작은 아이가 그 모습을 보더니 무척 따라 하고 싶어 했다. 잠시 후, 색연필과 큰 도화지 한 장을 들고 옆에 앉았다. 자기도 여기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졸랐다.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한쪽에선 숫자 패턴에 대한 문제 풀이 방법을 알려주고, 반대쪽에선 도화지에 경찰차를 그려주며 멀티 수업을 해나갔다. 그러다가 둘째가 엄마 무릎에 앉았다.
“엄마, 여기 이렇게 색칠해주세요”
아이의 요청에 나는 내가 혼자 색칠하기보다는 아이의 손에 색연필을 꼭 쥐게 하고 그 손을 내 손으로 감싸 쥐어 색칠을 해나갔다. 엄마의 단단한 손에 의지하며 움직일 때마다 색이 칠해지는 모습을 신기하고 재미있게 바라보던 둘째. 항상 엄마의 품과 엄마의 손을 형아와 공유해야 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지금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고 느껴졌다. 칠을 다하고 자동차에 아이 이름을 새겨줄 생각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여기에 이름 적어보자, 어떤 이름 쓸까?”
엄마의 질문에 바로 자신의 이름 두 자를 또박또박 답하는 아이. 그렇게 아이의 이름을 쓰자, 아이는 또 형아 이름도 써달라고 했다. 그렇게 형아 이름을 쓰자, 아이는 고민을 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엄마도 쓰면 어떻냐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답이 돌아왔다.
“엄마, 엄마 이름이 뭐예요?”
순간 아이와의 관계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 아이가 태어나서 지금껏 나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같은 집에서 만 3년이란 시간을 채워 살아가는 상황이기에 보통 관계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꽤나 늦은 통성명이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이와 나의 관계에선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 아이에게는 그저 나는 ‘엄. 마.’ 그 자체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이름, 그 의미와 역할도 분명 중요하지만, 엄마로 사는 것은 어쩌면 이름을 넘어서 존재감으로 전달되기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사랑과 따뜻함으로 전해주는 사람. 아이는 내 얼굴, 내 미소, 내 품, 내 손길, 내 마음, 내 뽀뽀를 원하며 내 이름만 빼고 나를 가장 잘 알고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해준다.
엄마의 이름 석자를 아이에게 또박또박 불러주고, 아이의 손을 함께 잡고 도화지에 적었다. 아이는 엄마 이름표 안에 감춰진 본명을 듣고는 해맑게 따라 말했다. 그 뒤로도 아이는 엄마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엄마의 이름을 더 자주 불러주었다. 마치 지난 시간을 만회하며 더 강하게 엄마의 이름을 마음에 새기려는 듯이.
고마워, 아가.
네가 엄마에게 소중한 존재듯,
엄마도 너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