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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자 Feb 24. 2022

글짓기가 제일 싫어

다섯 살... 기억이 나는 어린 날부터 나는 그림을 좋아했다.

맞벌이로 바빴던 부모님 때문인지 종종 외갓집에 맡겨지고는 했었는데 외갓집만 가면 종이와 연필을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젊었던(어렸던?) 이모, 삼촌이 잘 놀아주기도 했지만, 학교로 직장으로 나가고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만 남아 나를 돌볼 때면 그저 종이에 그림인지 낙서인지 끄적대는 것이 즐거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늘 종이를 찾는 나를 위해 준비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종이를 달라고 하면 할머니나 할아버지께서 문갑을 열고 종이 꾸러미를 내어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교에 들어가니 글짓기라는 숙제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기로 시작해서 독후감, 글짓기...

그때는 글짓기가 어찌나 싫던지 글짓기 숙제만 있으면 진저리를 쳤던 것 같다. 말로는 그렇게 수다스러우면서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왜 그렇게 부담스러웠을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까지 글을 쓴다는 게 싫었을까 싶은데 그때는 일기를 쓰는 법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 일기를 보다 보면 글쓰기 싫은 마음이 뚝뚝 떨어진다. 글씨를 엿가락마냥 길~게 늘어뜨려 한 줄을 겨우 채운 날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오늘 먹은 점심에 나온 메뉴만 나열해도 한 줄은 쉽게 넘을 것 같은데 그때는 하루에 있었던 일 중에 기억에 남는 어떤 사건을 글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꽤나 어려웠던 것 같다.

일기도 그 지경인데 다른 것은 오죽할까. 독후감은 책을 읽고서 느낀 감정들을 써내는 것임을 알면서도 글자 수를 채우기 위해 늘 줄거리를 베껴 쓰기 바빴고 글짓기라도 할 일이 생기면 세상에나 나는 창의력 따윈 없는데 절망하며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감성이 부족했던 걸까, 머리를 쓰는 걸 싫어했던 걸까. 그저 틀에 박힌 형식에 글을 쓰는 것에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냥 책 속의 주인공 뒷담화한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종이에 대고 이야기해 보라고, 너 같으면 어떻게 했을 거 같냐고 물어주고 싶다. 어차피 나는 작가가 아니고 말로 하는 대신 글로 주절주절 떠들어대면 그뿐이라고 말이다.


중학생이 되고 교내 백일장이 열린 어느 날.

여전히 나는 글짓기가 제일 싫은 학생이었고 담임선생님은 원고지 열 장 이상을 채워야 자유시간을 주겠다며 대충 끄적이고 빨리 놀고 싶은 우리들의 발목을 잡았다. 꽤나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학생이었던 나는 어떻게든 장 수만 채울 요량으로 내용이 맞는지 마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열 장을 빠르게 채워나갔다.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마구 써버리고는 어거지로 이어 붙인 단어들이 열 페이지를 얼추 채우자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제출해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교내 게시판에는 내가 쓴 글이 장원이 되었고 그 글은 교지에 실리게 되었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다들 노느라 바빠서 글을 쓰다 말았나.. 내가 글씨를 제일 많이 써서 운 좋게 걸렸나.

어찌 된 일이건 글짓기를 싫어하기에 내 글에 대한 믿음 또한 현저히 낮았던 나에게는 매우 참신한 경험이자 글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씻는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아직은 거리가 멀게 느껴졌을 때 내 감정 표현의 방식은 그림이었다.

한때 주로 그림을 그리고 뒤돌아보면 마음이 답답해 누구든 어디든 털어놓고 싶을 때 그 스트레스를 대신하며 그린 날이 많았다. 그럴 때는 그림이 상한 감정을 배설하는 한 창구가 되었다. 그림은 외부에 직접적이지 외치지 않으면서 내 직접적인 감정을 쏟아 넣을 수 있다는 부분에서 글로도 낯가리는 나에게는 참 만족스러운 표현의 수단이다.   


글짓기라는 말은 괜스레 부담스럼지만 기록한다는 것은 좀 더 친숙하다.

나이가 들수록 지나가면 사라져 버리는 시간에 대한 기록의 중요성을 더 깊이 느낀다.

소소한 일상과 감정들을 일기처럼, 메모처럼 기록하면서 글과 좀 더 가까워지고, 그런 기록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며 글을 통해 표현하는 재미를 느낀다.


늘 같은 일상이지만 기억해두고 싶은 순간들은 늘 존재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데는

글이나 그림이나 나에게 있어 이제는 동등하게 좋은 방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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