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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생활자 Jan 08. 2020

J에게

나의 애착에 관하여

30대 중반 아이를 키우며 육아 서적에 곧잘 나오는 ‘애착’이라는 단어에 내심 상처 받곤 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나는 흔히 말하는 ‘안정애착’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 중에 애착이 잘 자리 잡은 경우는 드물다.

최근에 나는 이외의 애착관계를 하나 찾았는데, 바로 나의 동생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 중 나의 동생과 아이에게 나는 안정애착을 갖고 있었다.





J에게

J야, 너에게 나는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 얼마 전 나의 어린 시절 애착이 있는 유일한 대상이 너라는 걸 알았단다. 그래서 너를 대할 때의 내가 본연의 나와 가장 가깝고 너를 대할 때의 나는 가식이 없더구나.

애착이란 게 말이지, 사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거더라. 20대에 연애할 때 들었던 생각 중 하나가 ‘이 세상에 날 사랑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사는 이유는 충분하다’라는 것이었어. 내가 살인을 해도, 미친 짓을 해도, 죽을병에 걸려도 날 사랑할 사람 말이지. 그건 말이야,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와 전혀 상관없이 ‘그냥 나’를 사랑하는 것이었어.


아이가 나에게 물었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엄마는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어떡할 거야?”

“속상하겠지. 그래도 널 계속 사랑할 거야.”


이 관계 속에 애착이 있어.




나는 나. 내가 하는 행동과 생각이 아닌, 본질 그대로의 나를 자아라고 한다더구나. 어릴 때부터 들었던 ‘자아정체성’이 요즘은 왜 이렇게 어렵게만 느껴지는지. 집에 오는 전철 안에서, 운전을 하면서, 나는 멍하니 나의 자아를 떠올려보곤 해.

타인의 평가에 좌지우지되는 나를 보면서, 그 행동이 그들로부터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시절의 나에게 물었어. 넌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거니? 그러자, 어린 시절의 내가 말했어.


“저 사람이 날 사랑하는지 시험해보려고 그래.”


많이 놀랐어. 그것은 ‘타인의 평가’ 때문이 아닌 ‘타인에 대한 테스트’가 반영된 행동이었어. 내가 그에게 헌신하고 배려한 만큼 응당한 행동을 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에게 배신당했다고 규정짓는 거지. 정말 끔찍한 게임이었어. 그 누구도 나의 헌신과 배려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게임이라서 그래. 나는 번번이 배신을 당했지. 그래서 내 안에 ‘피해의식’이란 끔찍한 놈이 생겼어. 나는 배신당할 때마다 분노하고 오열했지. 스스로를 감정조절장애나 성격파탄자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내가 이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이 딱 둘 있어. J 너와 내 아이야. 나와 애착관계에 있는 단 두 사람이지. 도원결의 같은 굳은 애착이 굳이 게임을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로 너와 나를, 나와 아이를 구축해준 거야. 그게 바로 관계의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해.

게임을 하느라 나는 매번 인간관계에 지치고 힘든 거였어. 내 나름의 미션을 수행하느라 항상 여유가 없었지. 또 그 사람이 미션을 잘 수행하는지 감시도 해야 했어. 누군가는 나를 보면서 조금은 불안했을 것 같아. 특히 부모님이 말이지. 그들이 어린 나를 대할 때, 항상 조심스러웠던 것을 나는 분명하게 기억해.


J야, 네가 보고 싶구나. 네가 해주는 긍정의 말들이 늘 진심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기쁘고 좋았어. 좀 더 자주 만나지 못해 종종 안타깝지만, 네 존재만으로 나는 항상 조금 더 살만해.


나의 편지가 슬픔이기보다는 기쁨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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