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골생활자 Dec 11. 2019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나를 초라하게 했다

그들이 날 사랑하게 하기 위해

글쓰기 수업의 마지막 주제는 사랑받은 경험의 기록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쓰기에서 사랑받은 경험을 썼던 나는 본보기 글처럼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힘든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사랑은 참 잔인했다. 사랑한다는 명목 하에 요구되는 것들을 생각했다. 그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나를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랑받았던 경험은 성인이 되어 어른스럽고 성숙하게 그들을 상대했을 때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미성숙한 나는 내 방의 책장 앞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 깊고 어두침침한 심연의 바다에서 나는 책을 들고 물속을 부유했다. 책과 나 둘 뿐이었다. 그 시간이 나에게 가장 편안했다.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에서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지우개를 쥐고 훔칠까 말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좋아했던 종류의 사탕이 놀이터에 떨어진 것을 보고, 그 사탕을 주워 물에 씻어 먹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5등 안에 들면 무언가를 사달라고 아빠에게 당당히 요구하는 동생을 보며 나는 왜 매번 5등 안에 드는데 아무것도 사주지 않느냐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아이, 어디서나 어른스럽고 바른 행동을 하는 아이. 아이답지 않은 아이. 나는 그 틀 안에서 고통스러웠다. 그들이 날 사랑하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초라하게 했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나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검을 생각한다. 내 아이를 위해 버렸던 나의 시간을 생각한다. 남편을 위해 그만두었던 나의 직업을 생각한다. 아픈 시어머니를 위한 덧없는 노력을 생각한다. 생계를 위해 선택한 전공과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녔던 회사를 생각한다. 그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나는 얼마나 잔인하게 나에게 그 검을 휘둘렀나.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객체 모두가 독립적인 자아여야만 한다. 나는 나의 아이와 남편을, 그리고 나의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독립적인 자아가 되지 못했던 초라했던 나를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고 바닷속에 가라앉아버린 어린 시절의 나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J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