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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생활자 Mar 30. 2020

당신은 누구에게 상처를 주고 있나요

몇 주 전 답답한 마음에 가까운 강원도의 바닷가에 다녀왔다. 운전을 좋아하지 않아 마음에 두고도 여러 날을 고민한 일이었다. 아이를 뒤에 태우고, 모래놀이를 위한 장난감도 실었다. 아직은 날이 차가워서 옷도 뜨끈하게 챙겨 입었다. 1시간 30분을 약간 넘기니 바다가 보였다. 모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다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시린 마음을 바람으로 채우며, 남편에게 바다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메시지를 본 남편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기가 막혔다. 답답한 마음에 여기까지 어렵게 찾아온 나에게 미쳤구나라니. 물론, 그의 말에는 미쳤구나 외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겼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센 농담이 아닌 위로를 받고 싶었다. 웬만하면 동네 밖으로 잘 돌아다니지 않는 집순이 같은 내가 여기까지 왔을 때는 결코 농담을 던질만한 가벼운 상황이 아니라는 걸 나와 12년을 같이 산 사람이 알아주길 바랬다. 바다를 등지고 집에 오는 내내 마음이 언짢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아이가 없는 조용한 시간 남편에게 나의 감정을 얘기했다. 그 당시 읽고 있었던 정혜신 님의 ‘당신이 옳다’의 한 페이지를 캡처해서 보여주었다. 같은 맥락으로 집을 나온 친구에게 ‘청승 떨지 말고 들어가’라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남편은 본인은 그런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를 설명했다.


그를 납득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의 말을 반박하던 남편은 ‘당신이 센 농담을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당신을 성실하고 좋은 남편으로, 우리가 가진 작은 회사의 능력 있는 사장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당신은 나에게만은 더 이상 센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나의 말을 듣고서야 나의 감정에 공감해주었다. 그의 센 농담의 뒤편에는 스스로의 연약함을 보이길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명절이 지나고 몇 주 뒤, 출장 간 남편 없이 친정을 찾았을 때, 친정 부모님과 남편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나는 그의 문제가 단편적인 것이 아닌 여러 복합적인 경험의 결과이며,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 마음을 보듬어줘야만 달라질 수 있는 부분임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께서 던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 문제 바꿀 생각 없으면 앞으로 여기 오지 말라고 해.”


나의 부모님은 지금까지 나에게 뭘 듣고 있었던 것인가? 그 어렵고 복합적인 문제에 이렇게 단순하고 폭력적인 해결책이라니. 나는 이 말을 듣고 며칠을 충격에 휩싸였다. 내가 40년을 들어왔던 이 말이 일종의 폭력이라는 걸 처음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또한 아이에게 이런 식의 폭력을 구사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아기 때 경험한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생존본능처럼 여러 가지 각본을 만들고, 인지하지 못한 채 그 각본대로 평생을 살아간다.* 내 남편이 가진 각본과 내 부모가 가진 각본 안에서 나는 종종 상처 받아왔다. 나는 상처 받는 이유를 자꾸 내 안에서 찾았다. ‘내가 예민해서, 내가 마음이 약해서, 내가 삐뚤어져서.’ 그것이 또한 나의 각본이다. 그렇게 나는 내 상처를 더 덧나고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각본에 지배당할지, 그 각본을 버리고 내 의지대로 살아갈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비로소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그 자유 안에서, 상처주기보다는 상처를 보듬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



*이 내용은 ‘에릭 번’의 ‘교류분석’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저는 심리학을 단편적으로 배웠을 뿐,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으므로 글 전체의 맥락과 그의 학술적 견해는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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